일본선교 토구라 그리스도교회 둘째날 사역보고입니다

by 황승훈 posted Jan 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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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지역을 위해 손을 올려놓고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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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욕탕에서의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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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교제


1/8 사역보고

6:00 새벽 예배

7:30 아침식사

9:00 선교 오리엔테이션 (토구라 지역의 특색, 일본 선교의 역사, 목사님이 토구라에 오게된 이유와 하시는 사역)

11:00 교회 청소

12:30 점심식사

13:30 심방 사역 & 축호 전도

17:00 기차역 노방전도 & 족욕탕 전도

19:00 저녁식사

20:00 저녁 기도회

22:00 세면

23:00 취침


 둘째날 사역은 새벽 예배로 시작하였습니다. 데이빗 목사님, 사모님과 같이 한 예배로 찬양과 안영민 목사님의 말씀증거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아침식사는 사모님께서 준비하여주신 오믈렛 등의 서양식 아침이었습니다. 챙겨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사모님 덕분에 정말 행복한 아침식사였습니다.

 9시부터는 데이빗 목사님과 함께 일본선교에 대해서, 토구라 지역의 특색에 대해서, 목사님이 토구라에 오게 된 이유와 교회에서 하시는 사역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일정 소개 이후 하단에 첨부해 놓았습니다.

 정보를 나눈 이후 아직 철거되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장식을 철거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목사님 내외분들이 연세가 있으셔서 이러한 사역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점심식사 이후에는 작년 선교에 가장 큰 열매가 있었던 심방사역을 하였습니다. 작년에 코리안 파티를 참석하였지만 교회에 정착하지 않은 가정 위주로 심방을 다녔습니다. 한분은 꼭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저번 선교때 영접기도를 하셨던 아라이상께서는 so so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심방사역이 2~3명의 소수로 사역하는 터라, 남은 인원은 지역을 돌면서 메일함에 코리안파티 전단지를 넣는 사역과 노방전도를 병행하였습니다. 저번 선교에도 동행한 마미짱과 같이 마을의 안내를 받으며 사역했습니다.

17시 이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족욕탕과 기차역을 갔습니다. 족욕탕에는 마미짱이, 기차역에는 퇴근하고 참석한 아키코짱이 참석했습니다. 족욕탕에서의 전도는 효과적이었지만, 기차역은 이미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후였습니다. 아키코상의 말에 의하면 4:30정도가 가장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아쉬움은 내일 사역으로 돌리고 복귀후 식사, 그리고 기도회로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기도회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기도회를 가지고, 특별히 사역을 위해, 토구라를 위해 축복기도를 하였습니다. 이후 안영민 목사님의 말씀은 사단은 우리를 과거로 참소하지만, 하나님를 우리의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분임을 믿으며 이땅의 영혼들이 자유하게, 우리의 사역 또한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자유하여 사역하기를 다짐했습니다.




선교 정보 : 다음, 다다음 선교를 위한 초석으로, 전략적이고 이 지역에 맞는 사역을 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자 합니다.


1. 일본 선교의 역사

 프랑스 카톨릭 출신의 일본 첫 선교사, 자비에르 부터,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500년에 달한다. 그당시 불교도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 불교는 일본 토속종교인 신토와 결합하여 거대해 졌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겠다.

 일본 기독교는 하층민부터 시작해서 초창기 많은 부흥을 했지만, 점점 신분 위로 기독교가 올라오면서 자신의 권력에 위기감을 느낀 다이묘들이 대규모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순교하고, 성도들은 지하 교회로 숨어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또한 얼마 안되는 숫자였으며, 그나마 규슈지방이 성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상태로 250년이 지났다.

250년후 일본은 문호 개방을 하였다. 이시기에 청교도 선교사들이 들어왔지만, 250년동안 기독교는 일본인들에게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종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천황이 인간임을 선언하고,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찬으로 개종하였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일본으로 온 맥아더장군이 자국에 5천명의 선교사를 요청하였다. 그 불씨를 살리면 일본은 기독교 국가가 될 확률이 많다는 판단하에서였다. 하지만 일본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던 미국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부흥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갔다.

 일본은 기독교 부흥이후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다. (데이빗 목사님은 일본의 경제성장도 기독교 부흥과 그때 흘린 일본인들의 눈물로 인해서 되었다고 보고있다.)그러자 일본인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경제 성장은 자신들이 이룩한 것이라는 자부심이 생기게 되었다. 최근까지 부족함 없고 성숙한 경제 하에서의 일본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데이비드 목사님은 일본의 이러한 자존감이 죽지 않으면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받이 쉽게 바뀌지 않을것이라 하였다. 최근 일본의 원전사고와 쓰나미 등이 일본인들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어, 기독교 부흥의 불씨가 원전사고 지역 근방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2. 일본인의 특성

 일본인들은 친절하다. 하지만 친절하게 들어주는 것이, 가령 '네' 가 '이해했습니다'는 아니다. 그저 '듣고있습니다'로 보면 된다.

 일본인들은 종교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토와 불교는 절기 행사로서의 의미가 전부이다. 굳이 영적인 것을 들여다보자면 일본인들은 기복신앙과, 무서움에 사로잡힌 신앙을 하고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기복신앙이 만나, 절기 행사 참여정도로만 종교 의례를 지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을 안지키면 불운이 따르고, 그게 무서워서 또 복 빌면 좋을테니까 하는 종교생활 말이다.)

 그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얘기하는 죄, 구원, 대속제물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 등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선교사들이 처음 일본에 왔을때에, '죄:sin'라는 개념이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사영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여러가지 신학적인 주석을 달아줄 수 밖에 없고, 전도가 굉장히 천천히 되게 된다. 데이비드 목사님은 일본이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이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가 단기간에 나오지 않고, 정말 한 영혼을 위하여 몇개월, 몇년을 기다려야 하는 선교지니까 말이다. 


 일본인들은 또한 '와'라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모나온 돌이 맞는다'라는 이야기는 일본인들에게 정말 강하게 작용하는 말이다. 도시지역은 조금 개인주의가 들어왔지만 시골지역으로 갈수록 가족단위의 집단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일본인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더이상 일본인이 아니게 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토와 불교, 거기에 속해있는 것이 일본인이고 일본인의 정체성 그 자체로 인식한다. 기독교는 아직 서양의것,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라 인식하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더이상 일본인이 아닌 것이 되게 된다. 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출신, 가문을 버리고 성을 바꾸는 것과 같은 무게다. 


 일본의 토속종교인 '신토'는 여러가지가 결합되었다. 간단히 살펴보자면 자연을 숭배하고, 조상을 숭배하고, 천황을 숭배한다. '신토'는 다신교이므로, 우리가 '카미사마와 아나따오 아이시떼이 마스'(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하면 10에 9는 '어떤 카미(신) 말입니까?'라고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일본에서는 신을 '카미'라 한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밖에 없는 유일하신 참 신이므로 기독교에서는 신을 의미하는 '카미'에 극존칭어 '사마'를 붙여 '카미사마'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신토는 또한불교와 매우 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만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한다. 



3. 토구라 지역의 특성

 토구라는 시골지역이다. 때문에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집단성이 매우 강하다.

 한 예로, 저번 선교때 전도하였던 아라이상도 자신은 영접기도를 하였지만, 가족들중 자신만 교회에 나올 수 없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집단에서 나오는 것을 굉장히 꺼리고, 거의 삶과 죽음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팀장의 사견으로, 이에 따라 가족단위의 전도 - 가정심방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토구라 지역 신토의 특성은, 조상 숭배에 대한 것이 강하다.


 또한 토구라는 영적 '무관심'이 매우 강하다. 구원이나, 천국이나 Whatever…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주의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무관심 이라는 것이 토구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볼 수 있다.


 토구라는 바로옆의 키마야마다라는 지역이 있다. (행정구역상 같은 시에 속해있다. 요즘 토구라 라고 하면 카미야마다와 토구라 두 곳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카미야마다는 100년 넘게 홍등가로 유명한 곳이다. (때문에 나가노 현에서 누구를 만나 (크리스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토구라에서 왔습니다.' 하면 '아, 그 토구라말입니까…………..'  라는 반응이란다.)  지금은 많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홍등가로 유명한 것이 토구라 지역이고, 세계 각지에서 여성을 붙잡아 영업에 사용하였다. 한국여자 또한 그런 식으로 팔려온 사람이 많다고 한다. 토구라 지역에서는 한국사람 하면 몸파는 사람들이나, 남자들은 포주나 건달을 많이 본다. 따라서 한류열때문에 조금 누그러진 정도의, 한국 사람에 대한 아주 안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현지사람들도 모든 한국사람들이 그렇지 않는것을 알기에, 우리가 전도할 때 '월요일에 한국에서 온 학생입니다. 코리안 파티를 준비하고 잇습니다…'라고 접근하는 편이 좋다.



4. 목사님의 사역, 개인적 이야기들…

토구라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지역특색인지 일본인 특색인지 모르지만 불신자들은 멤버쉽이 있어야 활동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고, 쉽게 바뀌지 않기에 멤버쉽을 조금이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역들을 한다.

 첫번째로 목요일 아침 기도회와 오후 Ladies Fallowership Metting을 갖는다. (레이디스 팔로워십 미팅은 여전도회라고 보면 된다. 성경공부와 교제를 한다. 이후 약칭 여전도회라 명한다.) 여전도회서는 2달에 한번씩 불신자들을 초청한 특별 meeting을 갖는데, 불신자와 성도 2:1비율이 된다고 한다.

 두번째로 남전도회 비슷한 성격의 모임을 갖는다. 성경공부가 위주이다. 토구라에는 사실 단 한명의 남성 크리스찬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공부에서는 불신자가 최대 5명까지 오는데,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예수로 시인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흥미가 생겨서 오는 사람들이다. 

세번째로 절기마다 다양한 행사를 한다. 추수감사절, 성탄절이 가장 큰 행사이며 매월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사가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네번째로 작년부터 삼일교회와 함께하는 6개월에 한번 있는 코리안 나이트이다. 삼일교회 이전에 온누리 등 선교단체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성도들은 지금 다음세대가 없이 20~80대의 연령분포를 보이는데, 목사님은 청년사역에 비전이 있어 다른 교회와 연합사역등을 하신다. JAM이라는 (팀이름인지 페스티발이름인지 헷갈린다. 아마 페스티발 이름일 것이다.) 교회 연합 페스티발에 참가하고, 청년 양육에 힘쓴다. 지금 교회에 청년은 거의 없지만 다음세대를 위한 비전과 준비는 계속 하고 있다.


 제작년 쓰나미 이후로, 복구를 위한 구호사역 또한 교회 연합으로 하신다. 2달에 한번 그 지역을 찾아가서 복구사업과 전도를 하신다. 많은 성령의 임재하심과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는 사역이라고 한다. 최근 복구가 많이 진행되어 가는 텀을 늘리고 계신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잉글리시 스쿨등에 참가하며 좀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신다. 수요일 사역에 잉글리시스쿨을 따라가 교제와 전도를 할 예정이다.



 오리엔 테이션 이후 사모님과 개인적 교제 시간에서 몇 팀원이 사모님의 개인사를 들었기에 첨부한다.

 사모님은 선교사님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sister가 있다고 한다.(언니인지 동생인지는 모르겠다.) 부모님들은 지금 한국의 조용기목사님과 같은 교단(순복음)소속이며, 개척 사역을 주로 하셨다. (개척 후 1년지나서 교회가 안정되면 다른지역으로 옮기는 등의 사역이다. 교회가 많이 없는 일본에서 중요한 사역을 하셨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에는 일본 기독교 내에서 꽤 유명하셨나 보다.) 이후 대만에 고등학교때 잠깐 살다 미국으로 대학진학 후 목사님을 만나 일본으로 다시 건너오셨다. 부모님과 다른 그리스도교 교단으로 오게 되었다.

 일본에 온 후 여러 지역에서 살았다. 목사님은 일본 중 어려운 지역에서, 복음의 초석을 다지는 도전적 사역을 싶으셨다고 한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닐때, 처음 씨뿌리는 것을 보고 감명받으셨다고 해야하나.. 하셨던것 같다.) 나가노 현 옆의 현에서, 정착과 교회개척후 너무 배척이 심해서 2년만에 토구라로 옮기신 것이라 한다. 그당시 (지금도 그러하지만) 토구라에서 유일한 교회로 섬기고 잇다.

 토구라에 온 후 세 남매를 키우면서 아이들과 장년층의 숫자가 비슷해졌다. 그때당시 100명가까이로 부흥하는 교회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녀분들이 자라나면서 세대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은 청년층이 거의 없으며 30명정도 모인다는 것 같다. 자녀분들은 일본에, 다른 나라에 부르심을 받아 선교를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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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께서 토구라로 오신 후 조사를 하셨다고 한다. 저 지도인데, 파란색으로 갈 수록 인구대비 교회가 많고(하늘색이 인구 300명당 1개교회) 빨간색은 전혀 교회가 없는 지역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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