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것 위에 세우시고(빌2:9-11) 그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다(마28:18)
그리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4)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간다.(히4:16,요15:16)
히브리인들에게서 '이름'이란 단순히 그 사람의 호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사람의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의 권위에 참여하는 것과 더불어 그의 전인격에 의지하고 의탁되어 복종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주문처럼 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의 이름을 외치면 질병도 가난도 다 떠나가고 모든것이 다 응답되고 이루어질것처럼 불러대면서 하나님께서 왜 기도할때마다 그 이름을 들고 나오게 하셨을까를 생각하지 않는다.
신약시대에 "예수의 이름"은 구약시대에 지성소의 언약궤위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 제사장이 열손가락에 찍어 바르고 들어간 희생제물의 피의 역할을 한다.
피가 없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길이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기대할수 없었다.
예수의 이름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에는
예수께서 피를 흘린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그 사건에 담긴 그의 인격과 사랑과 감성을 내 영혼과 인생에 그대로 적용하고자 하는 고백과 결단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름을 들고 기도할 때마다, 그 이름을 들고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그 이름은,
1.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기초를 상기시키는 안내문이다. (겸손과 감사.)
예수의 이름은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자녀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나의 몸과 마음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 지를 가르쳐준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사역에서는 내가 감당한 역할이 전혀 없다.
나는 오직 하나님을 배신하고 죽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기도할때마다 그 이름을 들고 나오라고 하신것은 그 비참했던 근본을 잊지 말고 끝까지 겸손하라는 것이다.
예수를 빼고 나면 우리는 그냥 그대로 무능력한 인간이다. 예수 빼고 내가 뭐가 된것 같은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최고의 덕목을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
여기서의 겸손은 나에게는 어떤 의로움도, 자격도, 능력도 없으므로 전적으로 예수만 붙들고 의지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근본 즉 우리의 본전은 "지옥"이다. 당연히 지옥에 가야할 존재를 구원하셨다. 어떤 상황이 그때보다 더 나쁠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께 불평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다.
감사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만족하라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감사는 현재의 상황에 부족함이 있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뭔가 구하면서도 할수 있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모든것에 대해 감사하지만 부족한것이 있으면 달라고 구할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취해야할 근본적인 자세이지 삶의 상황의 만족도에 따라 바뀔수 있는 감정상태의 표현이 아니다.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당연히 나와야 하는 자세이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던 근본을 잊지 말고 항상 겸손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오라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들어갈수 있는 통로에 "예수의 이름"이라는 안내판을 세워놓으신 것이다.
2.죽음의 표시이다.(자기부인)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는 첫 절차로 안수하고 제물을 잡았다.(레1:4-5)
이 "잡는다"의 원어상의 뜻은 처참하게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안수를 통해(레1:4) 희생제물에게 전가된 제사드리는 자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제사법을 따라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도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다. 거기서 나의 모든 죄와 옛자아도 예수께서 지고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죽고 다시 살아난 표시로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구원의 방법을 택하신것은 우리에게서 구원의 조건을(자생할 가능성) 손톱만큼도 발견할수 없어서, 죽였다가 다시 창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결론내리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달린 십자가에 나를 함께 달아서 죽이시고 성령의 역사로 재창조를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한다면 재창조는 시작도 안되는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이 죽는 작업은 평생의 하루 하루에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입으로 맨날 예수의 이름을 외쳐도 자기의로움, 정치 철학 과학등에 의한 자기신념, 세상에서 말하는 수양된 인격, 신앙의 연조. 봉사의 공로, 직분의 권위등등 자기의 자랑할 만한 것들을 들고 있다면 그는 아직 예수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사람들도 "율법주의자"에 포함된다.
(율법주의자란 율법을 잘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움에 이를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서의 율법은 구약성경의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롭게 보이고자 하는 모든 시도와 노력을 다 포함하는 뜻이다. 율법주의자라는 말은 "율법을 지킨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룬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오직 은혜) 벗어나서 의로움과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 모든 시도를 넓은 의미의 율법주의라 할수 있다.)
바리새인들과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처럼,
요즘으로 말하면 로마카톨릭,안식교등 구원에 자기공로나 율법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 처럼,
정통교회 내에도 그런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교회 안에도 있다.
꼭 신앙의 고백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의 자세에서 버리지 못하는 자랑꺼리나 고집이 있다면 그것도 자기의 의로움이고 율법의 근성이다. 그것이 끝내 깨어지지 않는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아주 무서운 말을 한다.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매일 매일 십자가앞에서 나를 죽이는 예수의 피에 의탁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의 재창조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우리를 죽이러 오셨다.
예수의 이름만 들고 나오라는 얘기는 죽어서 나오라는 얘기다.
내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인 예수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그 사실만 들고 나오라는 얘기다.
예수 이외의 어떤 고집, 신념, 자랑거리도 다 제거하고 나오라는 것이다.
3.인격적 감성적 소통.(사랑과 열정)
십자가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것을 건 사건이었다.
당신의 사랑과 열정을 모두 쏟아서 매 달으신 그 아들의 이름을 자신에게 나올때 마다 들고 오라고 하신 것은 우리도 당신에게 그와 같은 사랑과 열정의 마음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신것이다.
회사나 기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의 관계와는 달리 사랑의 관계에서는 이성과 계산만이 아닌 감성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서류결제 맞듯이 문법에 맞는 글자로만 소통할수는 없는 것이다.
서로의 감정과 기분을 살피고 그에 따른 반응을 할줄 알아야 한다.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뜨거운 눈물로 마음을 표현할때도 있고, 때로는 침묵으로 서운함을 표현할때도 있고,속삭이기도 하고, 격한 음성으로 부르짖을때도 있고.....,
눈빛이나 숨소리 하나만으로 서류 백장으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깊은 감성의 교류를 할수 있는 것이 사랑의 관계다.
사실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깊고 오묘한 감성을 표현하는데는 아주 무딘 도구이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소통에서 실제로 영향을 받는 부분은 말의 내용이 10프로정도이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표정,느낌이 90프로 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빛만 봐도 그 마음을 읽고 교감할수 있는 것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꼭 말로 표현안해도 느껴지고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충분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지식과 감성 모든 면에서 알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부부가 오래 살아서 눈빛만 보고 호흡만 들어봐도 알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의 그 "안다"는 단어는 지성보다는 오히려 감성에 가까운 단어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못할때가 많다.
죄와 나태함 가운데서 회개하지 않을때, 또는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위하여 필요할때 등 하나님이 침묵하실때가 그렇다.
부부간에 싸웠을때 아내가 말을 안하면 화를 내고있는 상태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태라고 남편들은 말한다.
아브라함이 육신의 생각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을때도 하나님은 13년간 침묵하셨다. 당시 하나님의 부재는 아브라함에게 그 어떤 고통보다도 무서운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후에 하나님과의 멀어짐 보다는 차라리 자기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결단을 했다.
꼭 아브라함이 겪은 것과 같은 무서운 침묵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침묵내지는 무관심을 경험할때가 많다.
하나님의 마음과 기분이 느껴지지 않을때이다.
어떤 것으로도 채울수 없는 하나님의 자리가 비어있으니 나의 전존재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런때는 당연히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게 되어있다.
그 안타까움의 깊이 만큼 강렬한 부르짖음이 나오게 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무관심하거나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설득하기가 힘들다. 낯설거나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예 마음을 닫고 들어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밀하고 신뢰가 가며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 예를 들어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정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꼭 하고 싶어한다면 사업자금을 대준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내가 얼마나 옳은내용 또는 많은내용의 기도를 입으로 하고있느냐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마음과 기분이 어떠신가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어떤 사람인가? 현재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가? 소통의 상대방인 하나님과 서로 원활하게 교통하고있는가? 가 중요한것이다.(약5:16)
그래서 나는 기도의 내용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얼굴과 기분을 살피는
작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만약에 두시간을 기도한다면 한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젖어서 그의 피에서 비롯되는 의의 평강에 힘입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관심에 찬 얼굴을 대하고자 힘쓴다.
이게 만만치가 않은 작업이다.
우리의 영은 예수의 피로 깨끗해 졌으나, 아직 우리의 몸은 두터운 죄에 눌려있는 상태이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그 죄에 짓눌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부르짖었다.
두꺼운 죄에 덮힌 몸을 가진 우리 입장에서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과 소통을 하자면,
우리의 죄됨과 영적인 무능력과 게으름에 대한 통회와 애통함이 당연히 수반된다.
부르짖지 않을수가 없다. 눈물을 흘리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을수가 없다.
통성으로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왜 "큰소리로 고함지르고 울고 불고" 하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쪽지에다 기도 내용적어서 강대상에 놔두지 뭐하러 매일 새벽기도는 다니나? 아니 그것도 필요없다. 하나님 다 알고 계시는데 기도는 뭐하러 하나?
하나님은 몇달 몇년의 기도기간이나 수만마디의 말보다 한방울의 눈물을 요구하실때가 많이 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우리를 막는 그 두터운 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는데,
우리는 그 육신의 벽을 뚫을 시도도 안해보고 자기 하고싶은 말만 뱉어 놓고 하나님의 음성과 기분은 외면하고 기도의 자리를 떠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좀 서운하시지 않을까?
기도에는 하나님과 그 은혜에 대한 찬양, 감사와 감격의 표현, 죄의 고백, 부르짖는 심정의 토로와 탄식,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탄원, 간구, 통회의 눈물을 쏟는것, 고요한 침묵으로의 소통 등등이 다 포함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구할것만 말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형식적으로 한 두마디 만들어서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 사랑하는 관계의 소통이라고 하기에는 좀 기형적이다.
예수의 이름에는 두터운 우리의 죄와 육신을 허무는 하나님의 열정과 감성이 녹아있다. 한없는 긍휼과 애틋함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라는 말씀이다. 인격적으로 소통하라는 말씀이다. 지성적,의지적, 감성적으로 소통하라는 말씀이다.
4.닮아가야할 모델이다.(순종과 성화)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관계를 맺다가 보면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게 되어 있다.
예수를 통과하면서, 내 죄되고 육신적인 성품이 예수의 성품을 바라보고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픈 마음도 있으시고 주실 능력도 있으시면서도 그냥 안주시고 오랜시간에 걸쳐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이유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구할거 구하면서 예수를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초신자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심을 끄시기 위해 다소 욕심섞인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경우가 많이있다.
그러나 어느정도 하나님을 알게 되고 소통을 하다가 보면 내 마음과 고집에 의한 기도는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성품에 우리의 기도를 맞추게 되고 그러다가 우리의 인생전체가 그 말씀과 성품에 맞춰지게 된다.
그러고 보면 기도는 우리의 바램과 고집을 관철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바램과 고집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나를 꺾는 작업이다.
(이는 매일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그 내용대로 거룩한 기도만 하라는 뜻이 아니다.
나의 중심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고 있으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것이 된다.
밥, 돈, 옷, 차, 집, 배우자, 직장등등 모든것이 내가 하나님군대의 군사가 되면 나의 필요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군대의 보급품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기도에서 어떤 내용을 얼마나 구하는가 보다, 나의 소속의 명확성이 중요하며 그것을 구하는 방향성이 중요하다.
나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 군대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향으로 가고자하는 진실성과 열정이 있다면 그릇의 크기에 따라 물질이든 사람이든 또 다른 것이든 얼마든지 구할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막11:24에서는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 "믿는다"라는 것에 대해서 오해를 한다.
우리가 마음의 집중을 하거나 또는 믿으려고 애쓰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고집 내 욕심을 들고 "밋~~~~~씁니다."라고 우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도 그렇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믿음도 그렇고 믿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고자 할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고 하는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바램인지 나로부터 말미암은 욕심인지 잘 분간해야 한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할때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내게서 비롯된 자랑거리와 고집을 전혀 들지 않은 빈손으로
온 열정과 의지와 감성을 다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마음과 소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게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작업이다.
단순히 자신의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르다.
신앙초기에 비해 지식적으로 머리속에 든것도 많아지고 다소 혈기도 죽어 여유가 좀 생긴거 같고,
예배와 성경보는 것이나 기도도 습관으로 들여져서 틀이 잡힌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자체만으로 솟아오르던 감격이 많이 무디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붙들고 살아야 하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어야 하는
“예수의 이름”에 대한 나의 태도가 세월만큼 뺀질 뺀질해지고 유들유들 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5년전에 쓴 글을 읽으며 그때를 생각해보고 지금을 살펴봅니다.
기독교신앙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세련되게 다듬어져야 할 필요도 있지만,
‘투박하고 껄끄러운 본질을 붙들고 지키는 것이 많이 중요하구나’ 라는 것을 뺀질뺀질해지고
유들유들해진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느낍니다..
P.S 초신자를 갓 벗어난 아마추어로서 신학적인 검토를 깊이 거치지 않고 기도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적어본 글입니다.
신학적으로 깊어질수 있는 내용들에는 너무 무게를 두지 마시고, 기도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들을 적어본 것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과하거나 잘못된 부분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