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는 공동체
불의를 당하는 이는 그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할 수조차 없는 이중고를 감내해야 한다.
이런 고충은 세상보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더 심각할 수 있다. 세상 법도 이제는 어느 정도 공평하게 사리를 판단하여 불의함을 규명하고 처단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일반 도의와 양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될 때가 많다. 그 내막은 분명히 신앙의 원리와 양심을 역행하는 일임에도 표면적인 절차상에는 문제가 없다고 엄연한 불의를 정당화한다. 그 불의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합법적인 결정을 불복하며 권위에 대항한다고 힘으로 제압하려고 한다. 가장 공평과 정의가 살아있어야 할 교계가 실제로는 세상윤리와 법 논리 정도도 통하지 않는 치외 법권의 무풍지대인 셈이다.
여기서 부조리와 불의에 의해 짓밟히고 매도당해도 제대로 하소연할 때도 없고 그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이나 기관도 없다.
대다수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고통당하는 약자의 편에 서서 진상을 규명하고 불의를 지적하며 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다. 기득권의 눈치를 보며 대세에 편승하기에 급급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일로 시끄럽게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한다. 불의를 당한 이가 그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라도 하면 잠잠하라고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 자기를 이해해달라고 하지 말고 침묵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투적인 경건의 용어에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매정함이 깃들여 있는지를 모른다. 십자가의 주님처럼 침묵하는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당신 하나 조용히 희생되면 우리 집단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기꺼이 희생양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공평과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 건강한 신앙공동체로서 발전하기는 힘들 것이며, 불의에 예민하신 거룩한 성령의 임재를 거스르고 상실하게 될 것이다.
결국에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쇠퇴를 면치 못할 것이다. 개혁교회의 근간인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이 흐려지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열심이 현저히 약화된다면 진정한 개혁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요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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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신학대학원의 박영돈 교수님의 페이스북 글을 퍼왔습니다.
여러가지 상황과 생각 속에서, 내가 얼마나 '개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매정함'에 깃들여 있었는지,
'우리 집단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을 바래왔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좋은 글이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