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부족한 내용이지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라는 생각에 글을 올려봅니다.
일반성도로서의 생각을 적은 것이며 많은 분들과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도 있구나’ 라는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못되거나 과한부분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거룩한 구별과 헬라적 이원론.
1.영지주의와 이원론.
1945년에 초대교회 수도사들이 거했던 장소 부근에서 초대교회 당시의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초대 기독교에 대해 뭔가 새로운 것들을 알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문서들의 내용은 바른 진리를 아는 기독교인들이 보면 황당하고 신성모독적인 내용들이었다. 그 문서의 내용들을 다룬 서적들은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얼마전에 이슈가 되었던 ‘다빈치코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내용들은 2세기경 이레니우스라는 교부가 '이단들에 대해서'라는 책에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성을 고발하며 적어놓은 내용들과 같았다.
초대교회로부터 거의 대다수의 이단들의 사상적인 기반이 되었을 만큼 ‘영지주의’의 폐해는 컸다.
그리고 현대이후 대두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뉴에이지 운동도 그 배경이 영지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근대주의시대에 이성주의와 인본주의가 끼친 폐혜 못지않게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새롭게 전면에 나타난 영지주의가 끼칠 심각한 폐해들이 예고되고 있으므로.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이 이 영지주의를 상대로 더욱 단단한 무장을 할 필요가 있는 때라고 생각된다.
영지주의가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플라톤의 철학에서 유래된 ‘헬라적 이원론’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현실세계)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현실세계 보다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본질적인 것들을 찾으려고 했다.
1세기 당시에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던(헬라시대 뿐만 아니라 현실의 세계가 있고 그 현실과 연관된 다른 영적인 어떤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를 접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생각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원론적 사상 구조에다가 초대교회 기독교의 교리들을 섞고 또 자신들의 생각들을 섞은 것이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영지주의에 대한 설명은 영지주의자들마다 그 설명들이 조금씩 다르고 어느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략적인 이해를 위해 글 하나를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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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사상에 의하면, 천상의 나라가 있는데 ‘플레로마'(충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천상의 존재들인 이온들이 존재하는 영적인 장소입니다. 이 천상의 나라를 구성하는 선하신 하나님이 중앙에 있고, 그 주변에 이온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존재합니다. 중앙에 극상의 하나님이 있고 이온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은 신약성경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이온이 30개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365개라고 하지만 그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이온들이 발출되었다고 억지 주장합니다. 발렌티누스가 쓴 ‘진리의 복음서’ 안에서 독생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묘사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이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온들은 함께 신격의 충만을 구성합니다.
30개의 이온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이온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치 글자와 같아서 글자들을 합쳐 또 다른 단어들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있는 이온이 이성과 진리이고, 맨 끝에 있는 이온이 소피아, 곧 지혜입니다. 소피아가 외도해서 ‘주물주(데미우르기)’를 낳았는데, 이 조물주를 창조주, 곧 구약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봅니다.
조물주가 창조한 세상은 죄악이 가득 찼다고 여깁니다.
영지주의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별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따로 있고, 외도에 의해서 생겨난 조물주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하나님을 조물주로 보기 때문에 악하다고 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에 선하다고 봅니다.
세상을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창조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죄악으로 관영해 있다고 억지 주장합니다.
이런 세상을 바라본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진리와 이성에 의해 태어난 예수를 세상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성육신한, 즉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외모로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진리와 이성의 자녀인데, 그가 소개한 천상의 지식을, 즉 영지를 알면 천상으로, 즉 플레로마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창조된 사람은 마음속에 영적‘씨앗’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씨앗은 영지를 통해 성장합니다. 그런데 육체가 그 씨앗을 영지에 의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육체적 금욕을 강요합니다. 육체를 제어해야만 영지를 통해 씨앗이 성장하여 충만, 즉 플레로마로 들어가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가르칩니다------정통과 이단(상) 라은성.
이런 사상에 기반을 둔 영지주의자들은 악한 신이 물질세계와 육체를 창조했기에 모든 물질은 악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악한 육체에 대해 극단적인 두가지 견해를 가지게 된다.
하나는 ‘금욕주의’ 이고 하나는 ‘율법폐기론’이다.
금욕주의로부터 중세기의 수도원운동등의 바르지 못한 태도들이 나타났으며 율법폐기론으로부터 현시대의 구원파와 같은 방종적인 계열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원론에 근거한 사상들은 성경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보증으로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성경의 진리와는 달랐는데도 당시 사람들의 사상구조와 유사한 면이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2.영지주의에 대한 분별과 경계.
물질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오해들은 현재 우리들의 교회내에서도 신비주의, 윤리적 능력의 결여, 바르지 못한 영성운동등 여려가지 모습으로 상당히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 같은 곳에 틀어박혀 세상적인 것을 배제하고 영적인 것만 추구했던 위험한 그 태도들은 현시대에 건강하지 못한 기도원이나 교회들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구원파등 이단 뿐만 아니라 정통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죄를 심상히 여겨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비윤리적이고 방탕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교회의 공예배의 설교시에 바울서신과 요한서신등에 있는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를 진지하게 다루며 그에 대한 경계를 강조하는 설교들이 많아지고 있고, 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르치고자 하는 기독교세계관 학교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등의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며 필요한 노력이라고 하겠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금욕적으로 학대하거나 아무렇게나 함부로 굴리지만 부활신앙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때에 이 몸이 씨앗이 되어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변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므로 몸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며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은 악한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근본 자체가 악하므로 그냥 악한 것으로 취급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것을 믿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타락의 영향이 전체 피조물에 미치게 되긴 했으나 창1:28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다스리라"는 명령은 취소된 적이 없으며 창9장의 노아에게 하신 명령으로 보아 그대로 유효하며, 그 피조물들도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믿는다(롬8:21) 그러므로 잘 관리해야 한다. 바른 관리에는 적절한 사용과 보존에 대한 노력이 포함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때가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이 땅에서 유효하다.
개혁주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의 사명으로서의 삶을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 교회내에서의 수도원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소금 맛을 내는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로 구별된 '성직'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소명으로 주신일에 대해서는 하는 모든일이 성직일 수 있다. 직업이 곧 성직이다. 그리고 그 일을 올바로 수행하는 것이 제사장적, 선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수 있다.
3.이원론적 구별과 성경적 거룩한 구별.
그런데 가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때가 있다.
헬라적 2원론이 악한 세상과 선한 천상의 나라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성경도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중심 테마인 ‘거룩’이라는 개념자체가 원래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개념에서 나온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과 세상나라적인 속성사이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할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홍해를 기준으로 갈라버리기도 하시고, 갈멜산에서는 엘리야를 통해 우물쭈물하지 말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서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력. 그리고 세상나라와 세력들의 대립과 점진적인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가 성경의 기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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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에 대한 분명한 구별, 하나님의 성품과 세상의 성품,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에 대한 구분을 분명하게 하라는 명령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명령이다.
성경에서 거룩하게 구별하라고 권고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숫자적으로 둘로 구분한다는 이유로 이원론적인태도와 혼동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는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초래하고 영적인 것을 등한시하게 되어 이성주의적 세계관에 빠져들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바른 부분에 대한 기초와 토대를 분명하게 잡아놓고 잘못된 부분을 깎아내고 도려내는 것이 위험성도 덜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교회의 무능력한 모습을 비판하는 글과 설교등에서 이원론, 이분법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하는데, 바르지 못한 태도를 지적하고 고치고자하는 의도와 노력에 대해서는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2라는 숫자 때문에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구분, 하나님의 백성의 태도, 방법과 세상백성들의 태도,방법에 대한 구분등
성경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할 것을 명령하는 부분에 대해서 까지 애매한 혼합주의적 태도를 취하게 될 우려에 대해서는 조심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지주의가 취하는 헬라적 이원론에 근거한 태도에 따라 나누는 것이 위험한 것이지, 둘로 분명하게 나누는 태도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교회의 일과 세상의 일.
교회 또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교회에만 갇혀 있고 세상일에 무심하며 거룩한 일과 세상의 일을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고 개선책을 찾으려는 시도와 노력은 매우 적절하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활발한 지적과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세상일을 대하는 태도가 이원론적인 잘못된 태도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진 태도인지에 대해서는 개별적 사안에 따라 좀 더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어서,
'정치활동은 속된 것이고 전도활동은 거룩한 것이다' 라고 한다면 이원론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면 정치활동도 거룩한 것이 될 수 있고 선한 것이 될수 있다.
선교를 하더라도 겉모양만 선교지 사람이 스스로의 열심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되면 그 자체가 죄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치참여든 선교든 내 신념이나 사상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되고 내 육신적인 생각과 습관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통과시켜서 해야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해야 하며, 하나님의 방법인 사랑과 온유한 마음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런 태도와 성품과 방법으로 행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겉모양이 화려하고 양적으로 효과적이더라도 세상적인 태도와 방법이므로 분명히 지양해야 한다.
세상은 악한곳이고 이세상의 삶은 죄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으므로 사회생활은 대충 해도 된다고 여겨 열정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 태도는 이원론적일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을 이루어야 하는 곳이므로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의 노력을 해서 감당하지만,
또한 이 세상은 유한하고 종말이 올 것이며 그 종말은 언제올지 모르며(개인의 종말이든, 세상의 종말이든)당장에도 올수 있다는 태도로 세상나라보다는 하나님나라에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할 태도이다.
그리고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악한 곳이기에 교회에서 세상적인 일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라고 하면 이원론적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적인 관점에서 세상에 대한 경고도 해야 하고 세상을 위해 기도도 해야 하는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보면서도
교회가 바라보는 관점과 세상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므로 그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공의나 사랑의 관점으로 봤을때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는 직접적으로 나서서 경고도 하고 간섭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 구성원들 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 대립할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의 경우 끼어드는 것을 자제함으로써 교회와 사회의 분란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정치와 종교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태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같은 절대적인 약자의 편에 서기를 권면한다.
상대적인 약자의 편에 서자면 세상은 대체로 5-70프로 정도의 다수세력과 3-40프로 정도의 소수세력이 이해관계를 가지고 대립하는 구조를 가지므로 계속해서 소수세력 편에 서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교회가 세상에 간섭해야하는 시점과 정도에 대한 바른 분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이 부분에서는 현시대의 한국교회가 과하게 소극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나는 유신시절 신앙적 양심 때문에 침묵할 수 없어서 독재에 항거하며 감옥에까지 간 목사님들과
현시대에 현실정치 곳곳에 나타나서 정치적인 신념을 위해 뛰는 목사님들을 같은 수준으로 보지는 않는다.
교회에서 의견이 맞서는 경험들을 하다보면 대체로 세상에서 비슷한 정치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서 대립하는 경험을 많이 했고, 또 그 정치적 신념에 의한 대립은 좀처럼 해결하기가 어렵고 생산적인 결과를 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수차례 경험으로 알았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느끼지만 세상의 일들의 옳고 그름은 그 보는 방향과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적 관점에서 봤을때 경고가 필요한 수준이라거나,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면 자기의 신념과 다른 신념을 가진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 주장을 절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한번 더 살피며 십자가를 통과하는 성경적 태도일수 있다.
이는 성도들간의 교제에서 뿐만 아니라 목사들이 취하는 정치적 발언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들 때문에 교회는 ‘거북이’ 또는 ‘미련한 단체’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또는 결론이 나지 않을 수 있더라도 소수의 지도자나 다수의 숫자로 결정하는 것을 자제하고 최대한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한다.
이렇게 느리고 미련해 보이는 태도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서 교회가 통일성이 있는 의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교회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일들에는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분명히 잘못되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들에 대해, 누구도 돕지 않는 애매한 상황에 처한 약한자 들에 대해서 더 깨어있는 태도로 살피는 방법을 취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따르고자 겉으로 보기에 무능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사안인지, 잘못된 신앙적 태도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고자 하는 소명의식이 결여된 것인지 개별적 사안들마다 하나님 나라의 성품과 방법에 비추어 세심한 분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5.결어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교회내에 있는 잘못된 사상들에 기반을 둔 잘못된 태도들에 대한 개선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교회가 처한 영적, 현실적 상황에 비춰봐서 그 어조가 매우 강할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 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교회는 마음을 열고 스스로도 모르게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고착되어진 영지주의의 폐혜들을 직시하고 도려낼 수 있어야 하겠다.
다만,
우리가 믿는 진리라는 것이 2천년동안 워낙에 많은 공격들을 받아왔고, 조심성없이 대처해서 의도와는 다르게 또 다른 폐혜쪽으로 기울었던 경험도 많으므로,
기초를 더 분명히 하는 태도위에서, 잘못된 것들을 도려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의 한국교회가 오순절 계열의 영향쪽으로 치우쳐 은사주의, 기복주의등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물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대사회적 책임면에서 많이 소홀하다는 생각은 바른 상황인식이라고 본다.
다만 그런 잘못된 태도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가지 않은 잘못’보다는 나가서 이길만한 ‘거룩한 구별’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을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나가지 않은 잘못’에 대한 점검과 함께 나가서 이길 수 있는 ‘거룩한 구별 능력’에 대한 점검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적 차원에서 더 살필 부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거 같다는 생각에 써본 글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