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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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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처음에는 별일 아닌줄 알았고, 조금 있다가 선장이라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밥맛이 없었고, 이어지는 정부와 기관의 대처에 우리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보니 숨이 턱 막혔고,......, 분노와 절망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자꾸만 떠오르려는 생각하나를 저 마음 구석으로 밀어넣고 싶어하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동영상 속에서 침몰 몇십분전까지 이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르고 장난을 하고 농담을 하고 있는 아이들.....,

그 몇십분후에 정말로 그 아이들의 목까지 물이 차 올랐을때, 그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목까지 물이차오르는 사고를 만나든, 병석이나 수술대위에서 쓸쓸히 천장을 바라보면서 맞든, 인생의 시간이 차든, 우리 모두는 반드시 그 상황을 한번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끈을 붙잡고 평안한 아이가 있었을까? 예수 믿지 않은 아이들은 어떤 심리상태였을까?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내가 왜 그‘사실’보다는 그 사실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들에만 마음이 쏠렸을까?

내가 반드시 한번은 겪어야 하는 ‘목까지 물이 차올라온’ 그 상황,

엄연한 사실이며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가능하면 마음 저 구석에 박혀 있어줬으면 하는 그 생각.

기독교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멸하셨다는 것인데, 요즘 보면 기독교인들이 죽음보다는 다른것들에 대한 치유에 주로 관심을 가진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생각들을 올려봅니다. 치우친 부분 알려주시면 고치거나 내리겠습니다.)

 

 

 

 

진단이 중요하다

 

 

1.인생.

시편90:10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말한다.

이사야40:6-7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라고 말한다

창세기 3:16-19의 심판을 받은 이후로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인생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모든 인생은 몇십년 또는 몇년 또는 몇일 있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 스스로는 그 죽음의 때가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이후가 어떻게 될지도 전혀 모르며 가족등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도 전혀 아는바가 없다.

사는 동안도 가난, 육체적 정신적 질병, 중노동, 인간관계의 갈등, 범죄 등의 고난에 덮여서 산다. 가끔 행복할 때가 있지만 그 짧은 행복 중에서도 그 행복이 사라질것에 대한 근심을 하면서 산다.

 

 

이런 인생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역사이래로 전쟁이 없었던 적이 불과 몇일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한 전쟁과 범죄 학대 등으로 물들여진 것이 이 세상의 역사이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선을 주장하나 분명한 기준이 없으므로 결국에는 힘의논리가 지배를 하게 되어 있다.

자기들 나름대로 룰을 정해보지만 룰을 지키는 쪽보다 어기는 쪽이 승리하는 부조리가 만연했다.

이것이 세상의 역사이고 그 역사는 지금도 진행되고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최고의 삶을 다 누렸다는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인생의 허무함과 권태로움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절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2.치료는 바른 진단에 따라 해야 한다.

그 허무하고 비참한 세상에 인생들이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죄와 죽음을 멸하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사건인지 평생 이 사실 하나만 제대로 기뻐하다가 죽어도 복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귀한 하나님의 선물을 바른 태도로 받아들이지 못해 여전히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거부하는 세상사람들이야 어쩔수 없다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중에서도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오신 복음을 받아들이는 바른 태도에 대해서 누가복음 18:13-14절에서 말씀하셨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세리는 자기의 죄와 그에 따른 비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진단을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암에 걸린 사람은 감기약이나 위장약을 먹어서는 치료가 안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

치료를 열심히 받는 것, 또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진단에 맞는 바른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철저한 절망과 사망을 선언하셨다.(창3:19,롬3:23) 구원의 방법을 오직 은혜로 예수를 보내시는 방법을 택하셨다는 것 자체에도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과 비참함에 대한 선언이 포함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먼저 '나'라는 존재의 상태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해야 한다.

그 절망의 진단 앞에 바로서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3.잘못된 진단들.

진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인본주의, 현세지향적 기복신앙, 율법주의등 건방진 인간취향의 신앙과 신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인본주의신앙은 세상에 대해 제대로 절망하지 못한 세상의 이상주의자들에 동조하는 신앙태도다.(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된 모든 신앙적 태도를 인본주의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에 전쟁과 학살 불공평등의 세상의 문제가 인간의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계몽주의가 나타났다. 계몽과 교육을 통해 인간을 개조하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한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교육을 시켰더니만 죄를 안짓는게 아니라 더 지능적으로 수준높은 죄를 짓고,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제국과 봉건주의등 기득권세력을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뤘더니만 더 악랄하게 제도를 이용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이 등장했다.

인간의 죄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세상은 이런 실패를 계속 반복해 왔다.

고전 1:20은 인간의 지혜의 미련하고 무익함에 대해 잘 진단하고 있다.

 

 

현세적인 기복신앙은 인생의 본질적 상태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몇십년도 제대로 못살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천년을 살것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에 빠지는 함정이다. 하나님이 진정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복에 비해 수억분의 일도 되지 않는 그 금방썩어질 것들에 목을 매고 온통 그것만 구한다.

누가복음 12:13-21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오늘밤에 영혼을 도로 찾으실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서 세상에 절어버린 사람들의 신앙태도이다.

 

 

율법주의는(예수님의 피에 의지 하지 않는 일체의 자기의로움을 포함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제대로 절망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죄가 되는 것은 자기들의 상태를 모르는 기초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골수까지 교만과 거짓으로 들어차서 자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진단을 받고도(롬3:9-18. 렘17:9) 자기네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낫기 때문에 하나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위대한 사도인 바울도 자기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고 처절하게 고백하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자기 스스로의 선을 고집할 수 있단 말인가?(롬7장)

 

 

 

우리의 병은 근본적으로 "죽음병"이다.

그 죽음병의 증상이 가난, 질병, 갈등, 범죄등의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죽음병을 고쳐야지 가난,질병, 부족한 인격,갈등등과 같은 증상만을 고쳐서는 잠시 나아지는 듯 보이다가 죽게 되어있다.

 

바르지 못한 진단에 근거한 신앙은 뿌리와 줄기는 그냥 두고 이파리만 새파랗게 치료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냥 불신앙의 상태보다 위험한 이유는 뿌리가 죽어 있는데 이파리가 새파래서 죽어가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번 더 진단받을수 있는 기회마저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4. 생명.

우리가 걸린 죽음병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부활이(생명) 내게도 적용되어야 치유되는 병이다.

 

 

헬라어는 이세상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비오스, 프쉬케는 태어나서 죽게되는 이세상에서의 생명을 말하며,

"조에"는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이는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조에"는 우리의 목숨이 다 했을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서 효력을 발휘한다.(요일1:3,갈1:4)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 생명을 가진자는 그 증거로서 "사랑"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 생명(조에)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가진것에 대한 증거를 나타낸다.

 

 

그 첫 번째 증거는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지하철 역같은 데서 길거리 전도를 해보면 실감나게 다가오는 예화가 하나 있다.

“소돔성문에서 곧 소돔성이 멸망할 것이니 회개하라고 매일 외치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성 사람들은 모두 그 할아버지를 정신나간 사람취급하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전혀 듣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왜 시간을 낭비하며 외치십니까?하고 누군가가 그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에 할아버지는 말했다. "내가 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무디어지지 않으려고 날마다 외치고 있다고".....,

 

복음을 들고 세상에 설때마다 '왕따'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때가 없었다. 복음과 세상이 조화롭게 화합했던 적은 없다. 만약 그렇게 보인적이 있었다면 그건 복음이 변질이 되었을때였지 조화로운때가 아니었다.

이 장망성에(계6:14)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하늘나라를 외쳐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젖게 된다. 복음의 선포는 그들을 살리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기위해서도 해야 하는 것이다.

마귀는 집요하게 침묵과 타협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거절하고 당당하게 '왕따'당하는 길을 선택해서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증명해야 한다.

 

 

둘째로

세상의 법이 아닌 생명의 법에 따라 사는 것이다.

 

고 강영우 박사는 한국계 최초로 백악관 정책 차관보까지 지낸 분이시다.

중학교때 사고로 실명을 당하고 그 일로 인해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신 아픔을 이기고 그 자리까지 오른분이다.

그는 몇 년전에 최장암말기로 1~2개월정도의 시한부생명을 선고받았는데, 수술을 잘하면 2년정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의사의 권유를 거절했다고 한다.

수술이 성공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인생을 정리하며, 너무나도 담담하게 아래 내용의 이메일을 지인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어쨋든 저는 신앙인입니다. 다음세상을 믿는 사람이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레이건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오늘 너에게 생긴 나쁜일이 내일 너에게 좋은일이 될 것이다.> 죽음이란 게 사람에게는 가장 나쁜 일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다음에 더 좋은 가장 좋은일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될 거에요. 전 그렇게 믿습니다."

 

 

"시력을 잃은것도 축복이었지요. 그 덕분에 더 열심히 살 수 있었습니다. 장애라는 것을 지옥으로 생각하면 그대로 된답니다. 그걸 축복으로 여기면 놀라운 일이 생기죠 무엇보다 만남의 축복이 옵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 받은 삶을 살아온 제가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허락받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국제 로타리 재단에 25만달러 기부하고, 연세대학교에 4억원을 기부할것을 유언했으며 자기의 마지막을 정리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생명(조에)에 의해 죽음병이 제대로 치료가 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인생의 본질과 아픔에 대해 날카롭고 냉정하게 진단을 한 다음, 너무나도 희망적인 치료를 하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법이 적용되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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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5.07 08:21
    죽음이라는 너무나도 큰 주제이다 보니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하는 부족하고 짧은 글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뜻에 서 예전에 쓴 글을 올린것이니 넓게 이해해 주시기바랍니다. 여기저기 읽은책, 그리고 틀은 설교(특히 담임목사님 강남교회 시절 설교)들의 짧은 내용들이 곳곳에 섞여 있습니다. 인용표시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