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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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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ㅍㅍㅅㅅ(프프스스)라는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입니다.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해운사의 부패와 잘못된 관행, 어이없는 일의 경과, 언론왜곡, 무능력한 정부의 여러가지 원인들이 이야기 되고 있지만, 전 개인적으로 그 모든 일의 연쇄작용을 끊어 줄 수 있는 기독교인이 그 모든 과정가운데 단 몇 명이 없었을까를 고민해 보고 묵상해서 쓴 글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비극적인 '세월호'사고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가장 극적으로 축약해서 보여주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배금주의와 인명경시와 온갖 부패가 관례화된 원인 중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잘못과 책임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삼일교회 교우들 역시 복음을 종교적 영역에만 가두어두는 '내세 천국'만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일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실천했으면 하는 바람에 여기에도 글을 공유합니다.
ㅍㅍㅅㅅ 원글 보기 
http://ppss.kr/archives/20164

오직 내세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과 윌리엄 윌버포스


지난 부활주일 후배 한 명과 종로 보신각 앞에서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탄식, 회개가 예배 내용의 주를 이루었는데 나와 후배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 국민들이 너무 불쌍해서…가진 자, 힘 있는 자, 잘난 자 외에는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마지막 남은 생명의 존엄함마저 무너져 버리는 이 땅의 현실이 너무 기가 막혀서…

                       ※이 땅에 교회 십자가는 저렇게 많다. 저 십자가들은 생명의 표시일까? 죽음의 표시일까?

사진작가 차주용씨 작품, 출처

사진작가 차주용씨 작품, 출처


그리고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불 꺼진 하늘에서 바라보면 온 나라가 빨간 십자가밖에 안 보인다는 이 나라가 어쩌다 이토록 천박한 인명 경시와 배금주의에 물들었을까?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를 외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잘못된 관행과 관례가 수십 년 째 변하지 않는 것일까?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나라 곳곳에서는 불의와 악이 판을 치는 것일까?

난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현실을 도피하며 내세의 천국만을 위해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하찮게 여기며 내세의 천국만을 위해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살아오면서 기독교인만큼 ‘현실’에 관심이 없고 ‘내세 지향적’인 인간들도 많이 못 봤다. 대다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현실 정치’와 ‘사회 참여’에 눈곱 만큼의 관심도 없다. 도리어 기독교인들이 ‘인본주의자’라고 비웃고 깍아내리는 가슴 뜨거운 사회운동가나 노동운동가들이 가장 억울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돌보고 있다.

그런 ‘내세 지향적’ 기독교인들이 잘 쓰는 표현들이 있다. 자기들 보기에 가장 숭고한 가치라고 여기는 ‘영혼구원과 교회성장’에 해당하는 것들 외에는 각각의 단어에 ‘세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그 가치를 깍아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린 그런 ‘세상’ 일을 하기보다 그 시간에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전도하고 말씀 한 장이라도 더 읽는 게 낫다”는 말을 곧잘 한다. ‘교회’를 주제로 한 것들이 아닌 것들은 다 ‘세상 일’, ‘세상 오락’, ‘세상 영화’, ‘세상 노래’로 그 가치를 깍아 내린다.

난 이런 습관적인 표현에서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고 하는데(요한복음3:16) 기독교인들에게 ‘세상’, 즉 이 땅의 ‘현실’은 부차적이고 하찮은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정말 그런 것일까? 이 땅의 현실을 ‘하찮고 부차적으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은 오로지 ‘교회 일, 전도 프로그램, 선교 행사’에 참여해서 한 명의 사람을 ‘교회등록 교인’으로 만든 것만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것이 건강한 신앙의 모습일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을 읽어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우리가 ‘내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길)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이 땅의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이 땅에서 먹고 사는 문제 해결해주시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나랑 날마다 부대끼는 저 웬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길)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이 땅의 삶에서 죄와 악의 문제, 유혹의 문제에서 지켜 주시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새번역 ]

지저분하게 굳이 괄호를 치며 설명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내용에는 놀랍게도 단 한 구절도 ‘내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주 기도문의 내용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 땅의 슬픔, 비극, 불의, 부조리, 고통에 눈감지 않고 고개 돌리지 않으며 그 생생한 비극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는 사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는 볼 수 없지만 그런 사람들은 분명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보이지 않게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 중에 역사적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사람 한 명 만 꼽자면 영국의 노예제도를 없애는 데 일평생을 바친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

※노예제를 폐지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을 다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2008년 3월 국내개봉)

※노예제를 폐지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을 다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게 된 것이 링컨 대통령과 남북전쟁 때문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영국에서 노예제가 어떻게 평화적으로 철폐 되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만24세인 1784년 영국의 하원의원이 된 후 1787년부터 노예제 폐지에 앞장서며 자신의 인생을 전부 바친다. 결국 1807년 ‘노예무역 금지법안’이 통과되고, 1833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하기 2주 전인 12일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는 것을 목격하고 숨을 거두었다. 무려 46년이나 걸린 평생의 싸움이자 과업이었다. 2008년에 국내 개봉한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그 싸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투쟁이었는지를 감동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정작 기독교인들 조차도 ‘윌리엄 윌버포스’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잠깐 상상력을 발휘해서 상상해보자. 만약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제가 존재했던 한국에 태어나서 정당한 정치적 방법을 가지고 싸우려 했을 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왜 그런 ‘세상’일에 에너지를 낭비합니까? 노예들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사명입니다!”

‘이봐, 자네는 기독교와 노예제도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 그건 정치적인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이야’ -실제 이 발언은 ‘짐 월리스’의 ‘하나님 편에 서라(IVP)’에서 50년대 백인 종교지도자가 흑인민권운동을 반대하며 발언한 것을 살짝 비튼 것이다.

※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있지만 무려 ‘윌리엄 윌버포스가 직접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

※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있지만 무려 ‘윌리엄 윌버포스가 직접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신앙적 멘토는 우리에게 ‘나 같은 죄인 살리신’(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가로 잘 알려진 ‘존 뉴튼’이었다. 그는 한때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회심하고 성공회 사제가 된 후 평생을 ‘노예제 철폐’를 위해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윌리엄 윌버포스와 함께 싸운 사람이다. 난 윌리엄 윌버포스, 존 뉴튼, 존 웨슬리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가장 참혹하고 슬픈 인권유린의 현장인 노예제도에 대해서 당시에 많은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그 비극의 현장을 외면하고 합리화 했을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무임금 노동인 노예제를 통해 자신의 산업과 자본의 상당부분을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노예제를 철폐한다는 건 거대한 기존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기독교인들은 그 참담한 현실 앞에 눈을 감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바쳐 싸웠고, 고쳐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은 ‘내세를 사는 기독교인’과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의 차이를 극명하게 구분해 보여준다.

 

현실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

아이러니한 역설이 있다. 현실 속에서 내세를 사는 기독교인들은 현실과 불화할 일이 없다. 왜냐하면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과 비극은 어차피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며 그들에겐 보이지않는 내세의 천국을 위해 영혼만 전도하면 끝나니까. 그러나 현실 속에서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은 사사건건 현실과 불화하게 되어있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기위해 끊임없이 현실 속의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싸워 나가니까.

그래서 많은 경우 ‘내세를 사는 기독교인’들은 ‘영혼구원과 전도를 위해서라면 위의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와 함께 현실 속의 불의의 권력과 결탁하거나 타협하며 위정자들의 독재와 기업의 횡포에 눈을 감아버리고 그들과 불화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런 신앙에 물든 교회 지도자들과 목사들은 ‘광주 민주화 항쟁’같은 명백한 불의와 학살 앞에서도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그 가해자들을 축복해 줄 지언정, 절대 그 학살의 주범들에게는 ‘회개하라’는 메세지를 선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힘없는 피해자들과 교인들에게는 끊임없이 ‘비판하지 마라. 침묵하라. 회개하라’고 외쳐대거나 현실의 불의를 항의하는 자들에게 ‘지나친 정의’라고 꾸짖는다. 게다가 가해자는 일말의 회개와 사과조차 없었는데도 피해자들에게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당신들이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현실이란 내세에 쌓아둔 하나님 나라 상급에 비례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부와 번영을 확인하는 역할로만 기능한다. 그래서 내세지향적 기독교인이 현실에서는 더욱 탐욕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유형을 드러낸다.

그러나 반대로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현실의 악한 권력자들과 끊임없이 불화하며 세례요한 처럼 자기 아내를 창으로 뚫어 죽이고 자기 아들들까지 권력을 위해 죽이는 서슬퍼런 헤롯의 권세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회개의 메세지’를 선포하다가 죽어간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 진짜 내세와 영생을 믿기에 현실의 부와 번영에 메이지 않으며 불의한 권력이나 가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산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격돌했던 예수님에게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예수님은 당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눅 11:47~48)

여기서 예언자란 선지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의미한다. 재밌는 건 저 말씀은 지금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은 ‘선지서’ 말씀을 깊이있게 강해 설교하지도 않고 설교 본문으로도 고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선지서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설교하면 ‘내세를 위해 사는 편안함 보다는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치뤄야 할 불편함’을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49~53)

 

맛을 잃은 소금, 비추지 못하는 빛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현실과 불화하며 현실을 살아내는 기독교인이 너무나 부족했기에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인명 경시와 배금주의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가 되어 버렸다.

비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장애인의 날에 정당한 시위를 벌이는데 최루액을 뿌리는 나라, 수백 명이 죽을지도 모르는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크레인 빌리는데 누가 돈을 낼 건지 따지느라 시간을 허비한 나라, 공부 잘해서 학벌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받는 급여의 반도 못 받으면서 일은 두 배도 넘게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 친구를 밟고라도 자신의 잘남을 증명해 내지 않으면 앞날이 불투명한 나라, 살아있음이 존중 받아야 할 선물이 아니라,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못하게 한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장애인의 날 장애인들의 시위에 최루액을 뿌리는 경찰 (출처)

장애인의 날 장애인들의 시위에 최루액을 뿌리는 경찰 (출처)


약자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런 생지옥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나만이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에 이민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해 보았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살겠다고 이 나라를 떠나 버린다면 자기만 살겠다고 탈출한 세월호 선장이나 승무원들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이 나라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데는 나 같은 기성세대들의 잘못이 제일 크지 않은가? 그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현실을 내버려둔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은 더욱 크지 않은가?

이 참혹하고 슬픈 현실 앞에 나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뼈아픈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구석 구석에서 제대로 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믿는 사람이 전국민의 1/4이나 된다는 이 나라가 이토록 총체적인 부패와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나라가 되어 버렸을까? 바로 현실을 버려두고 오직 내세만을 위해서 산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이 참담한 현실을 돌이키기 위해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바로 ‘내세의 천국’만을 위해 하찮게 여겼던 ‘현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내세 덕분에 밀려나 있던 ‘현실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와 친한 교회 집사님이 아주 쉽게 공감 가는 비유를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렸으면 쓰레기를 주우면 되지, 쓰레기를 과연 주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당신 눈 앞에 쓰레기가 있다면 줍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눈 앞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으면 도와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지 말고 그냥 도우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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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세를 위해 현실을 내버려두는 기독교인인지,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기독교인인지 짐작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이 있다.

‘교회일 말고 당신이 항상 신경 쓰고 기도하며 참여하고 있고,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현실 속 이슈’는 무엇인가?’ (정치, 사회, 경제, 복지, 교육, 문화~그 무엇이든)

만일 저 질문에 답할 만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면, 당신은 교회 일엔 헌신적인 교인일지 몰라도 결국 ‘내세를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기독교인 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당신이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비기독교인 친구가 한두 명도 없다면 당신은 내세 지향적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생전에 대천덕 신부께서 예수원에서 새벽 기도모임을 인도할 때 그날그날의 신문 기사들을 편집하고 복사해서 나눠주며 기도 모임을 인도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왜 그러셨을까? 대천덕 신부는 기독교인들이 이 땅을 살면서 내세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 땅을 변화시키고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기도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그렇게 행동으로 알려 준 것이다.

톰 라이트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개인의 영적 진보를 구하거나 우리의 깊은 감정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감히 말하건대,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패턴이다. 기독교 영성은 개인의 영적 진보를 구하는 이기적 행위가 아니다. ‘단독자를 향한 단독자의 비상’도 아니다. 그저 허공을 향한 외침도 아니며, 우리의 깊은 감정을 어루만지는 일도 아니다. 이따끔 이런 것들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말이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행위이며, 세상의 창조자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승리로 이 둘을 하나로 잇는 행위다.’

-주 기도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 배우는 희망과 치유의 기도) 톰 라이트, IVP-중에서

이 나라에 다시 생명의 가치가 회복되게 싸워야겠다. 두 눈 부릅뜨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싸우고 고쳐나가는 것이 가장 낮은 자, 소외된 자, 가장 아픈 자에게 마음을 두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최소한의 신앙 양심이 아닐까?

두 눈 부릅뜨고 참혹한 현실을 똑바로 보고 매 순간 격발되는 분노의 마음을 제어 한다는 게 너무 고통스럽지만, 세월호 참사에 자녀들을 잃은 부모들 마음만 같을까? 그분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며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내 나름의 싸움은 어쩌면 이 아픈 현실에 눈을 감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 각자가 간절한 도움과 구원이 필요한 눈앞의 이웃도 구하고 돌보지 않으면서 내세의 천국을 선포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리고 당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당신이 버려두었던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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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6 14:20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기독교인들,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기독교인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문제인식과 그에 대한 상당히 절망적인 진단에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의 부분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부분은 기독교인들이 착하게 무언가를 열심히 잘해서 이 세상이 정의롭고 사랑이 많은 곳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시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 그 모든 과정이 잘 이루어져 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뭔가 정의롭고 선한 행동을 해서 치유될 수 있는 수준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진단입니다.
    그것은 역사가 또한 선명하게 증거했고, 또 현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중심을 두고 바라보아야할 곳은 분명합니다.



    위글의 지적처럼 ‘내세 만을’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 자녀되는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그분의 인도를 따라 가장 시급한 일인 영혼구원에(성경이 이일에 얼마나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지를 보면 그 시급성은 객관적으로 인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성품인 정의와 사랑이 이 세상에 적용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최선을 다해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성경의 좋은 말들을 뽑아서 그것을 ‘깃대’로 들고 우리가 열심히 사회를 개혁하고자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실상은 자신의 정의감으로 불의를 개혁하고자 나섰다가 실패하는 사례를 너무나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의감으로 나서서 뭔가를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면 박차고 일어서서 나아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수준을 그렇게 높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세상사람들도 세상을 정의롭고 부패하지 않은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개혁가들이 그 대표적인 예지요.
    그들도 의도는 참 선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정도로 참담했지요.


    사회의 정의에 관심이 많고 소위 ‘참여적’이라는 기독교지도자들중에 상당수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멸망을 향해가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구원’ 등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 바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회의 부조리 등에 치우친 관심을 가지고 종국에는 세상의 개혁을 위해 타종교와도 연대를 넘어선 연합까지 쉽게 쉽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성경이 인간과 세상의 상태를 얼마나 절망적으로 진단하고 있습니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죽으면 다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상태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믿는다면, ‘영혼구원’과 ‘세상의 일들’ 어느쪽에 중심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 지도자 라는 분들중에는 신앙고백 자체에서 이런 것들을 사실로 믿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세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를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세상에 더 많이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인이면서 세상이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행동가라면 바람직하겠지만,
    세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중심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성경의 좋은 말들로 치장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성경과 하나님을 차용하는 개혁가들도 많이 있더라는 겁니다.


    위글의 문제인식에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심정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선지자적 경고도 해야 하고, 또 바꿀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또는 한국의 기독교, 또는 우리 교회라는 전체적인 집단들, 긍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진리자체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경향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면 약간 조심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바람직한 결과를 내는것을 본적이 별로 없기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일에 끼어들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내세’에 빠져서도 아니고, 세상에 관심이 없어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 있기 때문이며,
    세상과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병든 상태인지를 알기 때문이며,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의 참여에 대한 태도가 소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지금 우리의 상태는 이런 근본적인 이유보다는 영적인 게으름과 도덕적인 해이함에 원인이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글에서 지적하신 현재의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하며 심각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이고 감정이 북받쳐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족한 댓글을 달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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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8 12:06
    제 글에 관심가져 주시고 이렇게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겠으나~약간 저와 관점이 다른 부분이 있어 제 견해를 밝히기 위해 글을 답니다.

    '사회의 정의에 관심이 많고 소위 ‘참여적’이라는 기독교지도자들중에 상당수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멸망을 향해가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구원’ 등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 바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회의 부조리 등에 치우친 관심을 가지고 종국에는 세상의 개혁을 위해 타종교와도 연대를 넘어선 연합까지 쉽게 쉽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 전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정의감에 기초한 개혁은 실패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의감과 개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기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동의할 수 없군요. 그런식이라면 우리가 개인경건과 영성을 성숙하게 하려는 노력도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지 말아아죠. 무엇보다 제가 저 글을 쓴 이유는 너무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건전한 시민의식과 사회참여, 현실에 대한 관심은 없이 오로지 교회일, 교회일,교회일만 하는 것을 신앙인으로 자기 할 바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지적한 겁니다.

    그리고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공동선'을 위해서 타종교와의 연대를 무슨 종교혼합주의로 매도하는 시각들이 너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집안에 강도가 들어와서 싸우는데 '불교'신자들이랑 같이 싸우면 종교혼합주의인가요? 물에 빠져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이슬람' 신자들과 힘을 합쳐 그 아이들을 구하는 게 종교혼합주의라고 볼 수 있을까요? 말씀하신 종교혼합주의는 그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고 믿는 것이지, '공동선'을 위해서 타종교인들과 연대했다고 종교혼합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건 개신교의 뿌리깊은 베타성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개신교의 뿌리깊은 베타성은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상당부분이 말도 안되는 편견과 논리없음과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에서 기인한 겁니다. 하나 밖에 없는 영생의 진리를 믿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그렇게 베타적이고 편협하고 공격적으로 대처할 게 아니라 좀더 너그러운 관용과 여유를 가지고 타종교인들을 대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관용과 너그러운 사랑이야말로 타종교인들을 대할 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또는 한국의 기독교, 또는 우리 교회라는 전체적인 집단들, 긍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진리자체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경향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면 약간 조심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바람직한 결과를 내는것을 본적이 별로 없기때문입니다.'

    ==> 전 이 부분에 100% 동의합니다. 흔히 이런 경향을 '교회국가주의'(크리스텐덤)이라고 해서 역사적으로 봐도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인 악영향이 훨씬 많았죠. 그래서 저또한 이런 의미로 말씀드리는 건 아니구요. 제가 말한 건 개개인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와 정치, 역사에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한명의 개별적인 성숙한 시민으로 연대하고 참여하는 의미를 말한 겁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은 너무나 균형을 잃고 있으니까요. 교회일 열심히 헌신하는 분들을 폄하하는 글이 아닙니다. 교회가 돌아가려면 교회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듯이, 이 세상을 위해선 사회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가정에서 충실한 삶을 사는 데 더 집중하는 주부도 있어야 하며,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인들은 그저 대부분 교회안에서 예배만 하루종일 드리고, 봉사하고 교회 프로그램만 헌신하는게 유일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런 균형이 깨진 데는 균형감을 상실한 오로지 '교회일만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 만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가르침이 너나 할 것 없이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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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8 15:56
    저도 제 댓글에 대한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1.제 댓글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만 썼습니다.


    2.님의 말씀처럼 현실에 대한 참여는 꼭 '정치적이거나 환경적인 이슈'등에 대한 참여뿐 아니라 열심히 직장생활, 가정생활 하면서 사는 것도 포함된다고 봅니다. 열심히 사회생활하면서 교회일까지 하신분들을 ‘교회일’에만 매달려 있다고 표현하기는 좀 무리인거 같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나면, 세상의 정치,학문,환경 등에 대한 시각은 천차만별이 됩니다. 기준이 없어지죠. 누군가에게는 ‘균형’잡혀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심각하게 ‘불균형’하게 보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균형은 오직 성경이라는 기준으로 분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거 같습니다.
    성경에 입각한 기준을 많이 제시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3.‘연대’와 ‘연합’을 나름 구별해서 쓰려고 한 건데 글이 짧았나 봅니다.
    연대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바르다고 여겨지는 일에 비신앙인이거나 타 종교인이더라도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연합’이란 ‘생각이나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서 함께 동행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많은 ‘참여적’인 분들이 일련의 정치나 환경등의 이슈에 꾸준히 계속해서 성향이 비슷한 타종교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글이나 연설들을 보면 종교다원주의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어울리다가 보면 물이드는게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성경도 ‘어울림’(교제)에 대해서 각별히 유의하라고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고후6:14)

    타 종교인에게든지 비 신앙인에게든지 우리는 부드러운 사랑의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한 불쌍한 영혼들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교제’라는 영역으로 넘어가면 차원이 또 좀 달라진다고 봅니다.
    오래간 같은 이슈에 대해 동질감을 가지고 함께 하다가 그들의 사상에 까지 ‘관용’이 생기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란 감정의 동물이라 그 사람이 좋아지면 그 사람의 사상까지도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님께서 '균형'에 중점을 두고 말씀하신것처럼 저는 '조심성'에 중심을 두고 적은 글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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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8 16:29
    알겠습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위의 글에서도 밝혔듯이~전 교회일에 열심히 헌신하는 분들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성숙한 신앙인의 모델이 오로지 '교회일에 헌신하는 사람들'로만 한정되고 획일화 되는 것에 대해 경계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을 해야 한다는 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로 외치는 분들이 성경의 전후 맥락, 문맥, 역사적 배경, 신학적 고찰, 세계관적 해석 등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해석만을 주로 하고 있는 점 또한 불편한 진실이죠.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데 '성경으로만 돌아가자'는 말이 그런 분들의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상당히 피상적이고 공허하게 느껴질 우려가 있지요. 얼마나 성경구절을 많이 암송하고 알고있느냐보다는 얼마나 '깊이' 성경의 정신과 원리를 끌어낼 수 있느냐가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학교'같은 교육들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고 좋은 시도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연대와 연합에 대한 설명을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왜 그런 조심스런 경계를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여러가지 점에서 약간의 견해차이와 생각의 다름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같은 주제라도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제글에 좋은 논의를 함께해 주셔서 참 감사드립니다~~

    이런 논의를 공개적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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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근 2014.04.27 09:47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세상"으로보고 무조건 악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핼라철학에서 온 이분법적으로 보는 아주 나쁜 것 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기에 그리스도인도 조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의 최고의 위험성은 민중이 대상이 아닌 우상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항상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조화롭게 인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 민중, 사람에 메이면 인본주의 빠질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이 그런 조화로운 삶을 지적하지만....
    인본주의, 영지주의 에서 자유로운 글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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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8 11:38
    제 글을 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간단히 글 남깁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위험하다는 것은 제 글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개 그리스도인은 말과 생각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구분해서 대부분 교회일만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에 충성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이런 글을 쓴 겁니다. (이론은 그렇지 않지만 현실이 영지주의적 이분법에 젖어있다는 걸 지적하는 글을 '영지주의적'이라 오해하신 듯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신앙을 가진 분들은 사회에 건강한 시민으로 참여하는 행위를 오로지 자기가 맡은 일만을 성실히 수행하는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해 버리죠.(물론 그렇게 자기가 맡은 영역에서만이라도 직업윤리에 맞게 성실과 충성을 다했어도 이 나라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어 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적 연대와 정치적 관심과 참여 또한 시민으로서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자기의 삶만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사회적 참여와 변화를 위한 연대를 무조건 '민중신학'(아마 폄하하려는 의미로 쓰신 것 같습니다만)이라고 퉁쳐서 보시는 건 좀 상당히 안타깝네요.

    그리고 전 '민중신학'에 깊은 조예가 없읍니다만, 민중신학계열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참여와 역할에 대해서 한 말씀들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중신학과 더불어 인본주의 또한 폄하하는 의미로 쓰신것 같은데...

    인본주의라고 지칭하신 것의 정확한 의미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겠지요. 저도 그런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땅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 고통받고 아파하는 이웃의 삶을 관심갖고 돌아보자는 이야기가 어찌 '인본주의'가 될 수 있나요?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당시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배제당하던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이웃을 고쳐주고 수습한 이야기도 '인본주의적'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종교적 베타성'에 눈이 멀어서 '사마리아인'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시고 진정한 '이웃 사랑'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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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근 2014.04.29 08:43
    제가 오해했나봅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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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 2014.04.28 15:07
    세계관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에는
    단순히 종교에만 매진하는(내세)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정적 뜻을 담고 있다고 말이죠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외면한 채(사회적 이슈의 외면) 종교인으로서 드리는 예배는 예배도 아니라고 하네요

    정치 문제, 사회문제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무지하면 그저 대형 언론이 보여주는 프래임에 빠져서 판단을 흐리게 할 가능성이커지기 때문이죠

    용감하게 글 올려주신 권 집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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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8 16:37
    감사합니다~^^(적어도 우리교회는 점차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 '용감한'행동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ㅎㅎ)

    말씀하셨듯이 제가 간사를 하면서도 너무나 정치와 사회이슈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팀원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정치와 사회, 역사의식이 없고 무지한 것이 마친 경건함을 증명해내는 양 자랑하는 팀원들과 간사들도 참 많이 만났죠. '우리만의 천국'에 살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치, 사회, 언론, 역사에 대해 두루 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과 참여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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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8 20:33
    솔직히 앞으로는 이런 종류의 글들을 더 보고 싶지는 않은 마음입니다만, 이 게시판을 사용할수 있는 자유가 어느정도까지 인지 모르겠기에 일단 유심히 지켜 보기로 합니다. 얼핏 보기에 우리교회와는 신학적 방향이 제법 다른것 같은데, 한두번이 아니라 계속 된다면 교회에서도 신학적 판단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말씀과 진리에 관한 부분은 교회가 목회자에게 위임한부분이니 이 게시판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다룬다는 것은 아주 많은 조심성이 필요할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교회의 위임을 받지 않은 비전문가로서 겸손하게 선을 넘지 않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게시판이 선용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별 소득도 없을 도토리 키재기 같은 비전문가들의 신학적 논쟁으로 인해 소모적으로 사용되다가 폐단이 생겨서 사용이 제한되는 일이 없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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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조 2014.04.28 21:55
    말씀과 진리에 관한 부분은 교회가 목회자에게 위임했다는게 무슨 의미인가요?
    그 교회의 주체는 과연 누구며 위임이란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그리고 겸손하게 선을 넘지 않는게 바람직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선을 넘는다는건 어떤건가요???
    이런 기준들을 혼자만 알고 계시는 것보다, 저 처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알려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저같은 비전문가가 말씀과 진리에 관해 언급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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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8 22:23
    장로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직분자는 목사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제반사항을 치리하는 직분자는 장로이구요.
    당회가 구성된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권과 말씀에 관한 일차적인 해석권이 주어지는게 교회의 질서입니다.

    그것은 어떤 한개인인 목사가 똑똑하건 아니건 간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주어진 권한입니다.
    그 설교권은 교회가 기준 없이 중구난방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담임목사직를 위임할 때 그 권한과 책임도 함께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장로들도 함부로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그 설교권의 권위를 인정하기에,

    교회의 게시판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관한 글들을 올리는 것은 그 질서에 훼손이 갈 정도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설교방향과 현저하게 다른 내용이라면 그 설교권에 훼손을 가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마음에 안 들거나 문제가 있다면 교회의 정식기관인 당회등을 통해서 불만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에 맞습니다.

    저도 전문가가 아니기에 교회법에 대해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위에 적은 정도의 내용은 교인이라면 대체로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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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철 2014.04.28 23:59
    위의 글이 목회자에게 위임한 진리의 부분을 넘나드는 위험한 글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글에 대해 비전문가, 도토리 키재기, 소모적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법 말씀하시니까 하는 말이지만...

    장로회 정치의 특색 중 1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정치이다."

    교인이 자유롭게 게시판에 양심에 근거한 글을 못 올릴 정도의 꽉막힌 조직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덕분에 지금 교회 헌법 읽고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라는 말이 앞부분에 나오고요.

    교인은 양심의 자유가 있으며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그 권리를 침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교회의 자유의 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자유권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성경에 복종할 양심의 자유가 있으며,
    성경이 명하지 아니한 일에 대해서는 신앙과 예배 등 종교적 관계라 할지라도 각기 자기 얌심대로 판단할 자유가 있다!

    이렇게 되어 있네요.

    그런데 성도가 이 정도 글조차 못올리겠습니까?
    비성경적 이단의 글이라면 몰라도 삶에서 주님께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 고민하는 글에 대한 자유를 침해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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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07:38
    성도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양심과 자유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양심과 자유를 가지는 것은 누구도 제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양심을 "표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히 교회의 질서에 복종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표현할 자유까지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교회는 당회를 구성해서 전반적인 의사를 결정하고, 말씀의 선포와 진리를 다루는 일들은 교회에서 위임한 전문가인 목사가 다루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사의 통일성과 말씀의 통일성을 위한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은 당회의 구성과 위임목사에 대한 위임으로 교회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 그 대표자들에게 위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는 한도내에서 공개적인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한것입니다.


    이단이거나 유사복음이거나 진리를 해칠만한 내용이거나 하는 것도 교회의 위임을 받지 않은 몇몇분들이 결정적으로 판단할 내용이 아닙니다.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정통신학’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은 성도와 신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호감을 가지는 분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요.
    위의 글은 ‘민중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들과 유사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님이 보시기에는 위험하지 않지만, 위험하다는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그러면 우리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해서 게시판에서 토론을 해야할까요?

    잘못된 가르침들이 너무나 많기에 교회는 그것들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목사라는 직분을 위임해서 세워서 질서있게 분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서를 인정하고 지켜야 하는 선을 염두하고 글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에서 쓴글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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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9 10:40
    제글에도 사과하셨으니 다른 부분에 대해선 더이상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딱 하나 만 짚고 가겠습니다.

    "위의 글은 ‘민중신학’이 주장하는 내용들과 유사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민중신학에 조예가 깊으신 모양인데...저글이 어디가 어떻게 '민중신학'과 유사한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길게가 아니어도 짧게 몇가지만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민중신학'에 조예가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전 도리어 이 글을 쓸 때 세계적인 신학자 '톰 라이트'와 '김세윤' 교수님의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그분들이 자신의 책에서 이야기 한 것을 저의 언어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 만일 백형진님의 말씀대로 저글이 '민중신학'적이라면 우리교단 총신대 출신의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송태근 목사님의 은사이신 '김세윤'교수님도 '민중신학'적인 것이 되고, 톰 라이트도 민중신학적인 글이 된다는 이야기가 되서요.

    간단하게라도 '민중신학'의 어떠한 점과 제글이 닮았고, 그 지점이 왜 문제가 되는지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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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11:28
    민중신학(해방신학)은 사회주의 개혁 사상에 기반을 두고 성경을 풀어내는 아주 비성경적인 신학으로 알고 있습니다.
    급진적인 민중신학은 세가 상당히 줄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상들이 기반이 되었기에 소위 진보적이고 참여적이라는 교단의 목사님들중에 사회개혁적인 태도를 거의 의무적으로 생각하고 기독교인과 교회를 현실정치에의 참여를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기존의 열심히 사회생활하면서 교회생활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당히 폄하합니다.

    민중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현실의 개혁에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참여’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 강조가 대체로 정치적, 환경적 개혁에 관한 것들입니다.

    님께서 그 민중신학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위의 몇가지 태도면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겁니다. 님께서만 행하신다면 모를일이지만 공개적인 게시판에 게시되었으니 말입니다.

    주기도문의 해석에 대해서도 좀더 본질적이고 면밀한 설명을 하셨으면 좋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중신학회”라는 단체가 있더군요. 거기 홈페이지 가서 그분들이 한 공동성명을 읽어 보시면 그분들의 신학적인 태도가 어떤지 알 수 있을거 같습니다.
    제 부족한 설명보다 그게 나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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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9 13:22
    백형진 님은 결국 민중신학도 잘 모르시면서 제 글을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하시고 자기의 편견에 사로잡혀서 글을 이해하셨군요. 제가 글 어디에 정치적 선동을 했습니까? 그리고 기존의 교회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폄하했다고 하시는데 제가 댓글에 누차 강조했듯이 폄하의 의미가 아니라 한쪽으로 너무 치우쳤기에 반대쪽 균형 추를 잡는다는 의미라고 설명을 드렸는데 제글을 주의 깊게 읽지 않으시는건지 특정 단어나 표현만 나오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단순하게 구분지으시네요.


    바로 위 댓글에서 밝혔듯이 제 관점은 저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김세윤 박사나 톰 라이트, 존 스토트 등의 신학자들의 관점을 빌려온 겁니다.(주 기도문 해석도 마찬가지구요. 몸글에 출처까지 밝혔습니다) 사회참여와 현실정치에 관심가지라는 말을 했다고 민중신학적이라느니 위험하다느니 라는 표현을 하시는게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불의를 이야기하면 '종북 빨갱이'로 매도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요?


    건전한 토론과 논의가 되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예의와 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확한 개념과 논거가 있어야 겠구요. 굳이 백형진 님께 제가 이리 끝까지 댓글로 논박하는 것은 백형진님 같이 생각하시는 분들이 교인의 정당한 의문과 신학적 고민, 다른 생각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억압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폭력을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백형진 님의 저 근거도 희박하며 안이하고 피상적인 편견을 잠시만 내려 놓으시고 김세윤 박사님 책이나 존 스토트 박사님의 책들이라도 좀 읽어보신 후에 논의를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단지 자신이 몸담았던 교회와 신앙생활 했던 공동체의 고정관념과 룰을 전통적인 신학이라고 우기지 마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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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9 00:59
    하하...좀 건설적이고 좋은 토의가 되리라 생각했는데...실망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구차하지만 장문의 글을 좀 남기겠습니다. 백형진 님이 '우리 교회'라고 지칭하신 추상적 개념에는 백형진 님의 자의적 판단과 편견이 많이 들어가신 것 같군요. (신학적 방향이 같다는 '우리'의 범주와 신학적 방향이 다른 '우리'의 범주는 어떤 기준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저도 대청부 간사를 10년 정도 했고 삼일교회의 대체적 분위기와 장로교가 지향하는 바를 잘 압니다. 제 글이 장로교가 지향하는 원칙과 노선에 크게 거슬린다는 판단이 들었다면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을 유보했을 겁니다. 말씀하신대로 괜한 논쟁만 불러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백형진 님께서는 장로교의 특정 신앙칼라를 상당히 편협하게 이해하시는 것 같군요.

    그리고 설사 장로교의 신앙컬러엔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이단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 이상 이 정도의 이야기조차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시는 건 편협할 뿐 아니라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지기에 상당히 불쾌하군요.

    그리고 말씀과 진리에 관한 부분은 목회자에게만 위임했다고 하셨는데 개신교를 가톨릭적인 성직주의로 이해하시고 계시군요. 성직자와 교회의 권위가 성경보다 앞서는게 아니라는 칼빈의 5대 강령 첫번째가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입니다. 즉,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고 성경의 해석권이 성직자에게서 일반 교인에게 오픈된 것이 개신교의 종교개혁 중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저도 일반교인 치고는 나름대로 꽤 열심히 신학과 신앙에 대해 많은 공부와 독서를 해온 사람인데 공식적인 직업으로서의 목사가 아니라고 '별 소득도 없을 도토리 키재기 같은 비전문가들의 신학적 논쟁'이라고 간단히 폄하하시는 무례함도 상당히 기분나쁘구요.

    제 글이 읽기 싫으시면 안보시면 됩니다. 제가 글을 여기에 쓴 이유가 제 주장만이 옳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같이 생각해보자는 의미지요. 정답이 아니면 올리면 안되나요? 제가 일전에 소통에 대해 글을 쓴 것을 읽어보셨다면 이해하시겠지만 한국 교회가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은 목회자와 교인이 소통을 상실하고 상명하복의 구조로 고착화되면서 온갖 문제와 부패가 발생한 겁니다.

    권오철 집사님이 글 남기셨듯이 장로교헌법을 찾아보시죠.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아니라 교인입니다. 교회의 주인된 교인으로 이 정도 소통과 생각의 교환도 할 자유가 없을까요?

    제 생각과 다른 의견과 견해를 남기고 그 생각의 차이를 비교하며 토론하는 것은 언제든 환영입니다만 설득력없는 이유와 편협한 개인적 느낌으로 당신 글을 보고 싶지 않으니 글을 올리지 말아달라거나 신학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글을 보니 어이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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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07:54
    '별소득도 없을 도토리 키재기'라는 표현은 저를 포함한 위임받지 않은 비전문가 모두를 두고 한말입니다. 특별히 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느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이런 게시판의 특성이 이렇게 많은 논란들이 덧붙혀 질수 있으니 가능하면 교회가 인정한 질서내에서 의사표현이 되어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권과 말씀의 일차적인 해석권에 관한 얘기도 교회의 질서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일반성도가 아무것도 말할수 없다는 애기가 아니라 교회가 질서있게 유지되도록 정한 범위의 선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임을 양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표현한 '일차적인 해석권'이라는 뜻은 어떤 말씀에 대해서 교회에서 그 해석에 의문이나 분쟁이 있을때, 그 상회(노회나 총회등)에 의해 결정되기 전까지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해석이 잠정적으로 권위있는 해석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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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소영 2014.04.29 01:50
    저는 이런 종류의 글을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우리교회' 와 신학적 방향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본인의 신학적 방향과 다른거겠죠,,
    겸손을 말씀 하시면서 본인은 권대원성도님을 판단하는데 있어, 전혀 겸손 하지도 조심성 있지도 않으신듯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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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07:41
    네 죄송합니다. 말들이 길어지다보니 조심성없는 태도도 보인것 같습니다. 더 겸손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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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영광 2014.04.29 09:48
    솔직히 이런 글들로 인해 이 게시판이 선용되는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볼때는 이런 글들이 신학적 논쟁이라기 보다는 신앙을 생활에 접목시키면서 관습에 젖어 있던 부분을 깨우치는 효과라고 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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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10:40
    저도 구성원들이 조심스럽게 바른 태도로 임한다면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로 인한 선한 교제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위글의 내용자체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는 바가 있다고 적은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어서 소위 "민중신학 '이라는 것을 하는 분들이 주장하는바와 유사한점이 있다는 것에 걱정하는 생각도 있다면, 걱정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위험성에 대한 걱정을 제거할만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게시판이라는 장소와 대중의 토론이 유용할때도 있지만 조심하지 못할경우 좋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에 정해진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우선은 그 정해진 질서를 활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 질서를 최대한 지키는 선에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쨋든 당회와 목회자들은 교인 전체의 위임을 받은 대표자들입니다.
    신학적인 논쟁의 여지가 혹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글은 공개적으로 제시되기 전에 미리 지도자들과 상담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혹시나 제시하고 싶은 신학적 의견들이 있다면 목회자들과 상담해서 설교에 반영될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많은 오해를 줄일수 있을거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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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기 2014.04.28 18:17
    이글에도 감명을 받았습니다만... 이전에 쓰신 좋은 글들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물론 다 봤죠.
    이런 글이 단지 온라인에서만 흐르는게 아쉬워요.
    주보나 예스삼일같은 인쇄물에도 실려서 온라인 사용하지 않는 성도들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스삼일 담당 목사님이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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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8 18:36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위 글에 대해 이런 저런 조심스러워하는 말들도 많네요. 얼마전 게시판에 소통에 관한 글들이 참 많았던 걸로 기억 합니다.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의견이 있으면 충분히 검토하고 생각해본 다음에 공적인 매체에 오르는 것이 '소통'을 잘하는 공동체의 자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정 올려야 한다면 그와 반대되는 의견에도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소통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교회가 '소통' 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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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기쁨 2014.04.29 00:43
    본문글에 몇가지 딴지를 걸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에서 “세상"은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인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 구절에서 세상은 “성도" 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피조물 주제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거절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인간의 의지로 좌지우지 되어 결정된다면 이미 그분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시죠.

    하나님이 경륜해 가시는 역사는 오로지 하나님이 주인공이시며, 하나님의 관심 대상은 성도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로지 성도를 위해 주어졌을 뿐 믿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진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성도에게는 나타내셨지만 세상에게는 오히려 감추셨죠, 반대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거부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하죠.

    주기도문을 예로 드셨는데 "나라이 임하옵시며” 즉,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뜻은 하나님의 통치가 행사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며, 굳이 내세이든, 현세이든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길”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차라리 “시간의 굴레를 벗어날 그 때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이 이미 와 있습니다”라는 것이 의미가 통하는 해석이라고 볼것입니다.

    이후 계속 “이 땅에”를 강조했는데 주기도문을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것에 대한, 즉 윤리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지침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꽝"에 가까운 이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성도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본래 뜻이 있는데, 글자층에만 머물러 서둘러 쉽게 사람의 이해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도덕의 지침으로 변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윤리 도덕은 성경이 아니라 초등학교 책에도 잘 나옵니다.

    성도의 싸울 대상은 부조리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성도의 싸울 대상은 부조리한 세상도, 사단 마귀도 아닌 성도 자신입니다. 싸울 대상으로 부조리한 세상을 지목하는 순간 자신은 부조리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게 되는데, 어찌 믿는자로써 뻔뻔 스럽게 스스로 나는 부조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나는 여전히 죄인이며 죄인중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은 성도가 죽을때 까지 그 입에서 나와야 할 고백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보고 나올 탄식은 “나의 죄 우리의 죄로 인해 세상이 이렇게 되었고, 주님 내가 저들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최루액을 뿌리는 경찰이고 어떻게든 더 많은 복지가 나에게 올 것을 추구하는 장애인입니다. 내가 승객을 버린 세월호 선장이며, 내 아들 살려내라고 욕하고 소리치며 답답해 하는 유가족입니다. 주여 나는 이제 곧 침몰해가는 세월속에 주님 말씀보다 세상 선장의 말을 더 의식하며 쪼그려 앉은 저 학생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이 세상은 지옥임을 확실히 보오니 주여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둡고 침울한 세상에 빛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고, 썩어가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빛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까지 지셨는데 왜 아직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예수님은 능력이 없으셔서 아직 이 모양이니 이제 우리가 팔걷고 나서야 할 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그중에서 살아나도록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 역할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답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에게 현실은 절대 내세에 의해 밀려나 있지 않습니다. 내세라는 말 자체가 좀 부자연스럽네요. 천국은 나중에 올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속에 와 있으니까요. 진정한 성도라면 부차적인 윤리와 도덕면에서도 결코 모자름이 없을줄 압니다만 그러한 윤리 도덕적인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 성도들의 목표로 삼아야할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진정 세상을 걱정하는 심정은 마치 기울어져 가는 세월호에서 “야! 이제 가만 앉아 있으라는 방송은 그만 듣고, 뛰쳐 나가자!”라고 외치는 자의 심정과 같습니다.
    “그래 배가 기울었지만 지금 빵은 공평하게 나눠 먹어야지? 그래야 착한 사람이지? 배가 기울었지만 서로 욕하고 그래서야 되겠니? 너 벌점 2점! 벌점 10점이 되면 빵 안줄거야! 아이 참 어떻게 이렇게 욕이 난무하도록 아무도 나서지 않고 가만 있는단 말이지?” 이런 게 말이 됩니까?

    간만에 교회 게시판에 들렀는데 요즘 “세상에 착한일 많이해서 교회 체면을 세우자!”, “내 행위로 어떻게든 하나님께 잘 보여서 칭찬받자!”류의 글이 올라 오는 듯 합니다. 아닌것 아시죠? 목사님 설교를 유심히 잘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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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환 2014.04.29 00:54
    어떻게 권대원 간사님의 글이 “세상에 착한일 많이해서 교회 체면을 세우자!”, “내 행위로 어떻게든 하나님께 잘 보여서 칭찬받자!”류의 글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지... 참 난감하네요;; 저도 성도님과 같은 마무리를 하고 싶네요... 목사님 설교를 유심히 잘 들어보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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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근 2014.04.29 08:40
    이 글이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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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규 2014.04.30 04:32
    세월호의 마지막 비유는 이해가 되질 않네요
    탈출하라고 외치는 것이 기독교인의 행동하는 양심 아닌가요?
    한국교회가 지금의 모습까지 왔기에 자정운동을 하는 것 처럼요~

    배가 기울었으면 다행이지만 이미 가라 앉아서 에어포켓에 생존해 있는 생존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이런 에어포켓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지켜주고 함께 살아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와 기독교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자세요~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을 당장 구해내야 하듯
    권력에 억압받고 인권이 유린되며 범죄에 노출되는 사회적 약자 사람들을 교회는 당장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얼마전 세모녀자살 사건에 대해서 목사님이 말씀하신 연대책임의식을 갖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을 두고 기도가 우선이라고 하실건가요? 아니면 현정부 처럼 높은신 양반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구조를 억지로 늦출건가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태도의 변화가 지금바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듯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예수믿어라~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운동이되건 정부에 반하는 행동이건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세상 인간들 모두가 인간답게 살자고 하는데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치는 인생의 극단에 처한 한사람까지 같이 살아갈수 있도록 해주는거 아닐까요?
    너무나 기본적이며 상식적인 일입니다.
    목사님설교 들어 보라고 하셨는데~ 송목사님 설교를 듣고 이런 저의 생각들이 더욱 상식화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예수님은 늘 사탄앞에 패자입니다. (반론을 제기 할 수 도 있겠지만...)
    현실에서 사탄의 최대 무기인 돈과권력앞에 이길자가 있나요?
    302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세월호 사건도 결국 돈과권력 그리고 사이비종교 일종의 사탄이 만들어 놓은 종합선물세트 입니다.
    사탄은 늘 부지런 합니다. 지금이순간에도 부진런히 인간의 허영을 이용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허영은 주위의 억압된 자들을 돌아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저 교회 잘다니고 순종하며 십일조 잘하면 자손대대로 박사가 되고 천배만배 물질로 축복한다고 합니다.
    허영은 늘 긍정적입니다.
    하루에 40명 가까이 꾸준히 자살을 하는 나라에서 조차 주님이 축복하신다고 합니다.
    어쩌면 삼천억 짜리 교회가 세워지는 나라이기에 주님이 축복하실 수도 있겠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먼산 불구경 하듯 현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의 부지러함에 맞서 억압되고 눌린자들을 꾸준히 도와야 합니다.
    이런 사명에는 좌우도 세대간의 차이도 남녀도 인종의 차이도 그 어떤 정치적 성향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억압된 자들을 뒤로한체 복음만 전하고 다녔나요?
    그렇다면 성경이 주는 감동은 없었을거라 확신합니다.

    얼마전 철도민영화를 놓고 파업을 주도한 노조원들이 천주교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들이 많고많은 대형교회를 내버려 두고 왜 천주교를 택했을 까요?
    지금껏 개신교는 약자를 지켜주기 보다 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권력에 기생해 몸집을 불려왔기에 그렇기에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할것을 알고있지 않았을까요?

    끝으로 저도 결국 죄인입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죄로 인한 허물이 많은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이 허물 조금이라도 덜기위해 예수님 의지하며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억압받는 약한자들은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앞에서
    저의 부족한 믿음이~ 저를 가엽게 여기는 주님이~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도와주라고~ 간절한 기도만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도와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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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기쁨 2014.05.02 00:35
    행동하는 양심을 말할 때도 “그래! 내가 저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고 돈이 있으니 내것으로 저들을 도와 가난이든 아픔이든 어려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겠다. 노블리스 오블리제!”하고 나간다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선행과 부조리의 개선은 기독교인으로서 지는 의무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개인이 또는 집단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사회내에서 서로 합의한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발의되고 추진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선”이란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이 스스로 합의한 윤리와 도덕에 그 기준이 있지 않고, 전혀 관계도 없습니다.
    신명기 2: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어찌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전쟁에서 가축은 살리고 유아는 몰살시키시나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아야 하지 않나요? 그 젓먹는 어린것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죽이나요?

    디모데전수 6: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디도서 2: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종이 뭔지, 상전이 뭔지, 자유함이 어떤건지, 주안에서 모든 지체가 높고 낮음이 없음을 모르나요?
    "종들은 봉기하고 상전들은 종들을 자유하게 하라" 라고 해야하지 않나요?
    이 외에도 인간 기본 이성에 반하는 성경 구절이 얼마나 많나요? 성경중 저런 부분들은 찢어 버릴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아직 북한을 저렇게 두시나요? 차라리 지하교회를 만들지나 마시든지. 왜 믿는 성도들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반백년 세월을 보내시게 하시나요? 하나님은 인권을 모르시나 보죠?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구제 활동 및 부조리 개선을 해야지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사회 구성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것도 “아 하나님의 명령이고 내가 봐도 그 말에 동의가 되니 그것을 해야겠다!”라고 접근하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니가 고아고 과부다! 그래서 하나님인 내가 너를 돕겠다. 내 심정이 어떤 것인지 니가 고아와 과부를 도우면서 깨달아라!”라는 관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야할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세상에서 요구하는 선행 한개 두개 더하고 덜하고, 또는 세상이 정하는 악행 한개 두개 더하고 덜하고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인해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진정 그 속에 예수가 있다면 아마 행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게 주시는 의지의 발현을 행하세요. 그러나 그 행함이 반드시 세상에서 내게 또는 세상에게 플러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행함으로 내 생각에는 잘못 될 수도 있고, 잘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실 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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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조 2014.05.07 11:15
    “니가 고아고 과부다! 그래서 하나님인 내가 너를 돕겠다. 내 심정이 어떤 것인지 니가 고아와 과부를 도우면서 깨달아라!”라고 하신다는게 틀렸다는건 아니지만, 그 깨달음만이 목적은 아니라고 봅니다. 돕는 그 자체도 목적인거겠죠.
    사실 이런건 칼같이 구분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대로 행하면 되요.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다보면 말씀하신대로 "아... 내가 고아고 과부구나. 하나님이 날 이렇게 도우시는구나."하고 깨달을 수도 있겠죠.

    우리는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의중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가끔은 나도 내 마음을 모를때가 많잖아요.)
    하지만 그게 행동으로 드러날때 비로소 진짜가 되는거죠.
    왜 성경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하는걸까요?
    왜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고, 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는걸까요? 그렇게 해야 드러나고 증명이 되는거 아닐까요?
    뭐가 먼저인지는 중요한게 아닙니다. 중요한건 행동하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사회구성원인 것과 기독교인인 것은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교회 내에서는 많이 구분지어왔고, 그게 지금의 개독을 만든 원인이라고 봅니다.
    몸글도 그 지점을 지적하는 것이구요.
    오직 내세만을 위해 사는게 아닌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땅에서 천국을 이뤄가도록 하자는 말인거죠.

    성경에서 요구하는 행동을 한번 하는것과 두번 하는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글쎄요... 우리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이신데, 과연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요?
    뭔가 행동을 해서 마일리지를 쌓는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 행동들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무리로 적어주신 점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인용하면서 제 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게 주시는 의지의 발현을 행하세요.
    그러나 그 행함이 반드시 세상에서 내게 또는 세상에게 플러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행함으로 내 생각에는 잘못 될 수도 있고, 잘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실 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
    한준희 2014.04.29 08:20
    모두 삼일교인이신가요??????

    삼일교회에서 예배도 드리시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말씀 묵상하시나요?

    그럼 여기서 안보임의 "익명성" 굴레를 벗으시고, 5월 4일 주일에 만나서 차라도 한잔 하시며 이야기 나누시는 건 어떨까요?
  • ?
    박대근 2014.04.29 08:40
    혹? 체육대회 때 만나뵙는 그 분? 이신가요? ^^
  • ?
    한준희 2014.04.29 08:45
    동명이인입니다....

    그런데 머리벗겨지는 건 비슷하네요..
  • ?
    박대근 2014.05.04 09:40
    쵝오십니다
  • ?
    박대근 2014.04.29 08:39
    전 삼일교인 입니다
    ^^
  • ?
    박대근 2014.04.29 08:45
    맨 마지막 주제를 잘 못 읽었네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 ?
    이수훈 2014.04.29 13:24
    올리신 글이나 댓글들이 참 재밌고 유익해 보여서 저도 한 마디 껴들어 봅니다. ^^

    우선 '민중신학'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자면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다 '민중신학'이 아닙니다. ^^
    아우슈비츠 이후로 독일 신학자들 중심으로 제 1세계에 속한 신학자들이 반성의 신학 차원에서 '공적신학'에 많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구요.. 이 신학 운동은 유럽중심으로 평화.생태.인권.여성 등에 관한 폭넓은 사회 영역에 대한 신학적 적용과 실천의 차원으로 전개가 되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신학운동을 '민중신학'이라 부르진 않습니다. ^^;;
    민중신학은 제 짧은 소견으로 라틴지역을 중심으로 제 3세계에 속한 지역에서 맑스적 사고체계 안에서 경제적 해방 중심으로 신학을 발전시킨 운동으로 알고 있구요, 우리나라도 좀 많이 못살때 이 운동에 영향 받은 분들이 계셨죠. 요즘은 한국사회도 워낙 복잡해져서 경제적 해방이라는 지엽적 주제로만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접근하기에는 좀 그래서 위에서 어떤 형제님이 말씀해주셨듯이 이제 민중신학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좀 시들하죠.
    정리하면 '사회개혁' 혹은 '사회적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다 '민중신학'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

    중요한 것은 '신학'은 언제나 '상황'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잘먹고사는 제1세계에서 민중신학이 발전하지 못하고 지배당하고 못사는 제3세계에서 민중신학이 발전한 것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죠. 사실 '정치신학'도 세계대전 이후 제1세계의 신학적 반성이라는 상황 속에서 급속히 확장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오늘 한국교회도 반성적 차원에서 사회에 대한 관심 즉 공적 신앙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아시겠지만 현재 한국 교회 상태가 장난 아니잖아요^^;; 이틀에 하나 꼴로 교회가 경매 매물로 나온다고 하니^^;;
    70년대 이후 경제성장+개인주의의 확산과 맞물리며 한국 교회는 성장해왔는데요, 그러다 보니 한국 교회는 철저히 개인적.심리적.내면적 차원의 신학을 가지게 됐죠. 특히 미국의 일시적으로 집단적 회심을 일으키는 대중적 대각성운동이 수입되면서 심령부흥회 형식이 확산되면서 그 틀 안에서 각 개인이 심령적 회심하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구요. 뭐 이것도 꼭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보다는 당시 사회의 상황과 맞물리는 현상이었죠. 부흥기였으니까 그런 틀이 또 필요했을 테고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너무 개인중심적 신앙과 신학, 이로 인해 나타나는 개교회 주의, 또한 권위적인 근대적 문화가 교회에서는 교권주의가 강화되는데, 이것은 결국 목회자들의 일탈 행동과 각 교회들이 경제성장 속에서 성장주의에 물들어 무리하게 빚을 내서 교회건물을 짓기 시작하고 또 이로서 헌금을 강제하게 되고 또 각 교회들이 무한경쟁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지금 이모양까지 오게 되었구요.

    언제나 신학은 시대 상황과 함께 가는데요... 교회들의 이러한 이상한 방향과 행동을 가능하게 위해 각종 싸구려 신학들이 범람하게 됩니다. 원래 청교도 신학도 굉장히 엄격하고 죄에 대해 단호한데, 한국 교회는 청교도 신학 곧 개혁 신학적이라기 보다 그냥 값싼 구원을 중세 시대 면죄부 팔듯이 대중집회를 통해 마구 팔아버리게 되죠. 개인적 신앙, 개교회 주의를 더욱 강화한 것도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다 현실적 목적이 있는 겁니다.

    사실 개인적 신앙이냐 아니면 공적 신앙이냐의 문제는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의 물음과 똑같다고 봅니다. ^^a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사실 둘 다 중요하다는 거죠.
    사실 정치와 종교가 분리가 된지는 얼마 안되었습니다.
    고대에서는 왕은 신의 대리자였고, 중세에서는 천년의 신정국가였고, 종교개혁시기에도 칼빈이 제네바에서 정치인으로 살았습니다. 과학실증주의의 발전과 함께 신학의 정당성은 위협받게 되고 자유의 갈망으로 각 나라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종교의 자유를 외치게 되고, 암튼 정치와 종교가 서로 날카롭게 분리된지는 근대에 들어서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공적 신앙에 대해 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죠. 한국은 요즘 관심을 조금 가지지만 사실 유럽권이나 미국에서는 이미 몇십년 전부터 공적 신앙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주제와 논쟁점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사실 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이야기이고, 예언자들의 활동만 보더라도 얼마나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었습니까.
    예수님의 활동도 하나님 나라 곧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가져오신 연장선상이죠.
    좀 설명이 많이 필요한 주제이긴 한데... 어쨌든 예수님의 활동이 단지 개인적.내면적 종교 회심 문제라면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진 않았겠죠.
    세례요한도 헤롯의 비윤리적 삶을 고발하다 목이 잘렸구요.
    제자나 초대교회 교인들도 카이사르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고 말하다가 죽임 당한 거구요.
    오늘날 한국 교회처럼 그냥 신앙의 문제는 개인적인고 내면적인 문제라고 치부해버렸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위에 어떤 분이 '빛과 소금'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주셨던 '제사장 나라'의 소명이 이제 예수 안에 세워진 새이스라엘에게로 이제 연결되는 의미로 하신 말슴이죠. 빛과 소금도 내면적인 게 아니라 '제사장적 소명'으로의 부르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를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표현한것이구요.

    하나님 나라는 '통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말쿠트'를 번역한 헬라어 '바실레이아'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사건'은 왕되신 하나님이 이제 예수님과 그에게 속한 백성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시는 새언약 사역을 시작하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럼 당연히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심리적.종교적 차원 만이 아닌,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니까 온 세상을 향한 제사장적 소명을 감당하여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명으로의 초대라고 봐야 하구요.

    뭐 너무나 큰 주제라 여기서 설명은 다 못하고 간단히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공적신앙'을 위한 발걸음에는 '개인적 신앙'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앙'은 어떤 심리적 차원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이 고백이 감정적 확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곧 십자가, 그 십자가의 방식과 원리가 참 진리임을 확신하고 그 방식과 길로 내가 살고 그 방식대로 공적 신앙을 이루어갈 때, 결국 하나님 나라는 느리지만 승리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

    용서, 사랑, 포용과 관용, 인애, 정의와 공평, 긍휼, 인내... 등 이 모든 덕목들을 끊임없이 나와 공동체에게 자라고 있는 지 확인하면서 또한 동시에 세상에서 흑암의 세력에 의해 억눌리고 빼앗기고 소외되는 작은 자들에게 이 덕목들을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어쨌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엄마냐 아빠냐? 이게 아니라, 공적 신앙은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인데, 십자가의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외부로의 참여와 관심과 함께 동시에 우리를 면밀히 살피며 위선적 신앙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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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대원 2014.04.29 13:38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역사와 맥락을 너무 잘 설명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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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13:55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애기도 말씀속에 많이 있는거 같습니다. 말씀하시는 '공적신앙'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합니다. 다만 그 주제로 인해 개인적신앙에 변질이 생기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이고, 우선은 개인적인 신앙이 바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 신앙이 바른 모양으로 자리 잡혀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참여'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참여'라는 것은 정치,환경, 등에 대한 간섭뿐만 아니라 여러 모양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그 '참여'가 너무 편협하게 사용된 부분도 없지 않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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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조 2014.04.29 14:12
    공적 신앙과 개인적 신앙은 별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가 강해진다고 다른 하나가 무너지는게 아니라는거죠.
    굳이 구분하실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또한 그렇게 구분지어서 일단 개인신앙부터 세웁시다~라고 말하면서 한국 기독교가 여기까지 왔다고 봅니다.
    진짜 균형을 되찾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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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14:20
    별개라기 보다는 순서라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앙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행동에만 열을 내는 부작용을 염려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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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기 2014.04.29 14:46
    그런 염려까지 하실 필요가 있는 한국교회들이 아니지 않나요? 원글의 주제도 마찬가지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실참여를 너무 등한시해서 문제가 되지 현실참여만 해서 문제가 되는 분들이 몇명이나 되나요. 개인적인 기우를 마치 큰 문제인양 잣대를 휘두르신 모양새죠. 아무튼 님 때문에 좀 더 논의가 진행된 측면은 있네요;;
  • ?
    백형진 2014.04.29 15:14
    글쎄요 그렇게 보신다면 어쩔수 없습니다. 다른 측면에세 고민하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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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영광 2014.05.07 09:26
    이제야 봤네요~ 댓글들을 보며 아리송 하던 것을 잘 정리해 주어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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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04.29 13:45
    제가 소위 '진보적'이라는 교단에서 몇 년간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참여'를 독려하는 설교에 알러지가 있어서 조금 반응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에 열심히 참여하는데 신앙적인 태도가 전혀 꽝인 사람들을 많이 겪다 보니 그 '참여'라는 것이 믿음에서 나온건지 자기 신념에서 나온건지 의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민중신학'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자라 보고 놀란가슴 솥두껑보고 놀란다고 그 민중신학회에 속하신분들이 하는말과 비슷한 말들을 보고 과민하게 반응한건 아닌가 추스러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본문의 문제인식과 여러 가지 내용에 많이 동의 합니다. 그러나
    '참여'라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그에 대한 생각들은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말들이 좀 과격해진것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점은 진심으로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고 그에 따른 주장은 계속 하게 될거 같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보수적인 기독교인인거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깨달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이 소리 또 듣는 다고 답답해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히려 복음으로 안 된다는 생각에 뭔가 새로운 것들을 섞는 바람에 생기는 부작용도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글들을 읽고 마음 상하셨을 모든 분들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쟤도 저러는 데는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넓게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
    이수훈 2014.04.29 14:27
    ^^ 그렇죠. 누구나가다 주장점엔 맥락이란게 다 있게 마련이죠. 사람이든 신학이건 뭐건 말이죠. ^^*
    송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듯 이 땅엔 진정한 정치적 보수라는게 없어서 문제죠. 진짜 건강한 보수가 정권을 잡았다면 세월호같은 후진국형 사고도 안터졌을테구요.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진짜 보수신학이 제대로 자리 잡았다면 건강하게 잘 성숙해갔을 텐데, 보수신학이라기 보다 빤스목사같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기독당 같은 수꼴근본주의나 신비주의,물신주의,목회실용주의와 같은 세속적가치들과 혼합된 굉장히 싼티나는 신학들로 버무려져버렸죠.
    정치나 신학이나 건강한 보수와 진보가 서로 열린 장에서 서로를 존중해주면서 주어진 성서를 놓고 함께 토론하면서 계속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건전한 신학들을 공급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님들도 목사님들이지만 성도들도 양질의 독서를 하면서 체력을 튼튼히 해야할테구요. 만인제사장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미개한 양처럼 여기면서 자기 영혼을 마냥 목사님들께 맡겨버리는 분들이 꽤 많거든요 ^^; 그럼 교회가 절대 성숙할 수 없다고 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것도 성도들에게 성경을 돌려주고 성도들이 성서의 본래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폭발력을 가진 거지 목회자들만의 잔치는 아니었잖아요? ^^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이런 글과 댓글들은 참으로 좋은 고민들로 보여집니다. ^^
  • ?
    백형진 2014.04.29 14:32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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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근 2014.05.04 09:42
    이런 똑똑한 토론들이 있을 후 있다니........
  • ?
    김명진 2014.05.06 11:31
    흠.. 가끔 들어옵니다만,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이 오가는 모습이 좋아보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믿음 후의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에 대한 생각들이 오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이 다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고,
    다시 삶을 살아가는 과정들을 반복해서 겪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삼일교회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라가는 방향전환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