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가 ㅍㅍㅅㅅ에 기고한 '기독교인과 정치'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원래는 한개의 장문의 글이었으나 좀 길어서 편의상 두번에 걸쳐 기고하는 형태로 실렸습니다. 두개의 글을 하나로 묶어서 여기에 올려봅니다.
상당히 긴 내용이나 기독교인이 현실 정치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접근하며, 행동해야 하는지를 나찌 히틀러에서부터 근현대사에 걸친 개신교의 부끄러운 모습에 이르기까지 살펴본 글입니다. 기독교인은 정치적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만한 기회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주장하는 바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도 많은 줄 압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견해 중 하나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성경은 비정치적인 책이 아니다] 원문 링크 http://ppss.kr/archives/21693
2. [기독교인이야말로 정치 견제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 원문링크 http://ppss.kr/archives/21912
성경은 비정치적인 책이 아니다
흔히 교회에서 듣는 말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은 정치적이면 안된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교우들과의 모임이나, 교제의 자리에서 특정한 정치적 이슈를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신실한 교인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관례이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인이 정치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 말일까?
우리의 일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영역은 없다
정치란 무엇일까? 보통 많은 분들은 정치를 특정한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이 하는 활동만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우리 삶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영역은 없다. 정치의 정의를 살펴보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정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정치]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
(2)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일.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는 1번의 의미로서만 협소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2번의 의미로 정치의 의미를 확장하면 우리가 회사나 교회, 가정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 또한 1번의 의미로서만 사용한다 하더라도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려 할 때, 대의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 간접적으로 선출된 정치인들에게 시민들은 자신의 권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분명한 의사표현과 주장을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자신의 권익과 권리를 판단하고 주장하는 것의 기준은 결국 개인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깊다. 결국 넓게 정의하면 ‘정치란 인간의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모든 영역에서 가치를 비교하고 선택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1번이든 2번이든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상의 삶에서 ‘탈정치적인 이슈’란 없다. 심지어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는 소비의 영역에서조차 정치적인 판단은 들어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 대기업 제품을 쓰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디자인이나 제품이 맘에 안들어서가 아니라 그 기업의 부도덕함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면 그의 소비행태는 충분히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
성경은 비정치적인 책이고 영혼구원에만 관심이 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이 비정치적인 책이고 성경의 관심은 오직 ‘영혼구원’에만 관심이 있다고 믿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상하리만치 한국교회의 설교강단은 성경 속의 이야기들 중에 ‘정치적 색깔’을 탈색하는데 능란하다. 그러나 구약성경뿐 아니라 복음서, 신약성경 곳곳들 면밀히 들여다 보면 성경이 당대의 정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직접적인 언급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특히 그런 부분이 도드라진 것은 구약의 선지서들 속의 선지자들(예언자들)과 당대의 왕들, 종교지도자들의 충돌이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 그리고 복음서에서 당대 종교지도자들과 사사건건 갈등과 긴장관계에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레미야만 보더라도 당시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 과정에서 다른 제국들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 사이에 유다 왕국도 멸망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멸의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 말씀을 마음놓고 어기던 유다를 향해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했고, 그 대가로 박해 ,폭력 격리, 수감 등을 당했다.
예레미야서에는 당대의 왕들과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과 긴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채로운 것은 예레미야는 당대의 왕들이 듣기 원했던 말들을 마치 하나님의 음성으로 왜곡해서 선포하고 아부하였던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과 그들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가 매우 생생하고 준엄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구절이 ‘예레미야서 28장’인데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시드기야 왕에게 바빌로니아 왕국을 꺽을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한다. 이에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거짓 예언을 책망하며 다음과 같은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언자 하나냐에게 말하였다. “하나냐는 똑똑히 들으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예언자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도록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이 지면에서 영영 없애 버릴 것이니, 금년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네가 나 주를 거역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예언자 하나냐가 바로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예레미야 28:15~17]
예레미야를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당대의 첨예한 정치 상황에서 왕들과 거짓 종교지도자과의 틈바구니에서 ‘현실권력에 타협하지 않은 예언자의 목소리’를 드 높이다가 온갖 박해와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이런 모습이 정치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어떤 게 정치적인 모습일까?
하나냐와 같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의와 그분의 뜻보단 위정자들의 비위와 권력을 세워주는 거짓 선지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한국기독교의 근현대사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정치’에 대한 올바른 관념과 의식을 교육시켜야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교회내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행동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묵하고 가만있는 것이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한 침묵과 비겁함을 ‘경건으로 기만’하는 문화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런 정치 교육이 필요하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고 지지하는 정치인이 다르고, 어떤 이슈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지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며, 현안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가능한 문화를 교회에서 교육시키고 만들어줘야 한다.
그가 특정 정당에 소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가 장로이기 때문에, 그가 유명한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하고 반대하는 문화가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사람됨과 그가 어떤 공약을 주장하고 있고, 이 공약이 내세우는 바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약속을 잘 지켜왔는지에 대해 꼼꼼히 따지고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과 교인들은 그 정치인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교회를 다니는지, 교회를 다닌다면 직분이 무엇인지만 보고 덮어놓고 지지하고 뽑아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가장 기만당하기 쉽고, 속이기 쉽고, 설득이 필요없는 맹목적 군중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정치인들 중에 왜 유독 ‘기독교인’이 가장 많을까? 기독교가 선교를 잘해서? 만일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장 속이기 쉬운 맹목적 기독교인 중의 한명이다.
기독교인들이 현대정치에 저지르기 가장 쉬운 끔찍한 잘못 중의 하나는 바로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기독교와 교회에 호의적이다’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지지하거나 뽑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뽑힌 최악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히틀러다.
추태화 박사가 쓴 ‘권력과 신앙’이라는 책에 보면 독일교회가 어떻게 히틀러를 옹호하고 부역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독일교회는) 나치 정권에 협조하면 국내선교도 원활할 것이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제공받아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는 직, 간접적으로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교역자들이 전적으로 오판(誤判)하였다.”
성경은 탈정치적인 책이 아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읽어내렸던 이사야서61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폭력적 권력과 독재, 로마와의 야합을 통해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던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서슬퍼런 경고의 말씀이었는지 우린 짐작할 수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 이사야서 61:1,2-
당대의 종교지도자들, 헤롯, 로마의 총독이 만일 저 글을 읽어내려가는 젊은이를 현장에서 바라보았다면 아무런 정치적인 위협을 받지 못했을까? 아니면 자기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위협이라고 생각했을까?
예수님은 그런 종교,정치 권력자들의 견제와 감시를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성전에서 폭리를 취하며 부패한 정,재계,관료들의 ‘돈줄’인 성전안의 시장을 뒤집어 엎으면서 그들의 이익과 권력에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와 성전안의 시장을 뒤집어 엎는 단호한 선지자로서의 행동은 그가 ‘돈과 권력’으로 매수불가능한 ‘정치적 제거대상’ 1순위인 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보여준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증인을 매수했고,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며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재판과정 만큼 ‘정치적인 장면’이 또 있던가?
기독교인이야말로 정치 견제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
존경 받는 선교단체 대표, 목회자들의 정치적 참여 – 한국 기독교의 흑역사
대학생 선교단체 CCC의 김준곤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교회연합신보>1973년 5월 6일)
그리고 광주민주화 항쟁 직후인 1980년 8월 6일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 전두환을 앞에 두고 군권찬탈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장도를 축복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한 목사로 지금까지도 칭송 받고 있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제주 4.3학살의 주동단체인 ‘서북청년단’에 대해 아래와 같은 증언을 했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 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한경직 목사와 제주 4.3사건 참조 링크
재미있는 건 위에 언급된 목사들이나 단체들은 ‘기독교인은 정치적이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색채의 신앙칼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저들의 행태는 그 누구보다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던가?
비정치를 주장하는 정치 목사들
사실, 위에 언급된 목사들과 교회 말고도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친일, 독재, 반민주적 폭압에 앞장 선 예는 무수히 많다. 한 예로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옥중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당대의 장로교 평양노회에서 면직을 당했으나, 면직 복권된 것은 2007년 예장통합 측 한 군데뿐이었다. (지금은 예장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교회와 목사들의 신앙적 전통(?)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서 기독교인이나 교회가 정치적이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가장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설교가 끝나고 보수정당의 후보를 아무 거리낌 없이 강단에서 소개하는 것과 자기 소속 교회 출신 후보들에게 대놓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 등이다.
그러면서 교회 내 모임이나 구역모임에서는 정치에 대한 대화와 논쟁은 교회 분란을 일으키므로 가급적 이야기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어떤 교인들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서명운동을 받는 것 조차 정치적 활동이라며 강력히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기독교인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활동 중에 ‘정치적이지 않은 행동’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이슈를 꺼내거나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정치적 이슈’로 정의내린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록 더 이익을 보는 정치집단에게 그 역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마디로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받는 것이다. 그럼 가만히 있으면 비정치적인 행동이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때로는 불의에 대한 침묵이라는 가장 무서운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 마틴 루터 킹 -
‘시놉티콘’ 형성에 앞장서야 할 기독교인들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중의 하나는 ‘나 한사람만 윤리적이고 기독교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면 이 세상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물론, 각성된 ‘한 사람’의 힘과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한 사람이 각성해서 싸우고 노력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소명을 다할 때 ‘윌리엄 윌버포스’나 ‘반올림’을 조직해서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에 대한 정당한 회사 측의 합의를 이끌어 낸 ‘황상기’씨처럼 놀라운 일들을 해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든 윌리엄 윌버포스, 황상기씨도 혼자만 그런 싸움을 싸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알았고 그들을 돕는 무수히 많은 동지와 동역자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만 잘하면 된다’는 ‘개인환원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 약자들의 연대와 협력, 시민들의 각성을 이끌어내는 단체행동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중에 가장 중요한 행동이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활동이다.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판옵티콘’에 반대되는, 다수가 소수를 감시하는 ‘시놉티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특정 분야가 부패하고 썩어서 문제가 많을 경우, 그 분야 종사자들에게만 직업적 소명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그 이해관계에서 비켜서 있는 시민들이나 타분야 인사들이 그 분야의 자정작용을 위해 힘을 써주고 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론이 썩어있어서 온 국민이 진실된 정보를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라면 언론인들에게만 그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TV를 보고 신문을 보는 시민들이 단체행동에 나서서 견제하며 올바른 언론사를 만들기 위해 힘써주는 활동이다.
그리고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들이 부패하고 전횡을 휘두르면, 직업인으로서의 생사여탈권을 갖고있는 담임목사나 장로에게 항명하기 어려운 부목사들에게만 올바른 행동과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당연히 부목사들도 그래야 하지만) 교인들이 제직회를 소집하고 항의하고 소통하며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기관과 공권력이 부패해 있다면 거기 종사자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해관계에서 비껴서 있는 시민들이 깨어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가 활성화 될 때 이 사회와 나라가는 분명 더 건강하고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를 하기 위해 하는 활동이 ‘시민참여활동’인데 영국의 경우는 시민참여활동을 한번이라도 한적이 있는 시민이 전국민의 무려 90%를 상회한다. 특히 최근의 경우는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 혁명으로 직접 현장에 가지 않아도 직간접적인 다양한 방법으로 의정활동을 감시하거나 견제하고, 후원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기독교인은 공동체를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파수꾼이다
예수님이 말했듯이 기독교인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한다.(마태복음10:16)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상당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가장 속이기 쉽고, 기만하기 쉬운 무지몽매한 대중이 되어버렸다. 단지 교회만 다니고, 기독교인이기만 하면, 또는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 집사같은 그럴듯한 직분만 있으면 덮어놓고 지지하고 찍어주니까.
언제까지 덮어놓고 속여먹기 제일 쉬운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기독교인들이 바보짓을 할런지 잘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간사한 정치인들의 밥이 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교회만 다니면 덮어놓고 지지해주는 것에서 탈피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그 후보나 정당이 지지하는 가치가 충분히 공동선에 기여하고, 다수 지역 주민과 국민의 권익과 존엄을 지키는 ‘기독교적인’ 것이라면 ‘불교’를 갖고 있건, ‘무교’이건 상관없이 그 정치인을 지지하고 뽑아줄 수 있는 정치적인 성숙함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우리가 다수의 공동선을 위한 올바른 가치관을 분별하는 것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복잡하고 혼란한 이 시대에 기억해야할 말씀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누구보다 ‘깨어 있어야 할’ 파수꾼의 사명을 이야기하신 ‘에스겔서’ 말씀이 아닐까?
만일 내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이르게 할 때에,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자. 이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어떤 사람이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해서,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자기 탓이다.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다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파수꾼에게 묻겠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에스겔 33:2~7 새번역]
기독교인은 사리분별 못하고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유명하고 권위만 있어 보이면 무슨 망언을 지껄여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부름받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수고스럽지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알아보고, 더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다. 교회다닌다고, 장로라고, 우리교회 교인이라고 덮어놓고 찍어주시는 분들…이번에는 제발 그러지 좀 말자.
참, 내가 이야기했던가? 나찌정권의 유대인 학살을 도와 1급 전범으로 재판받아 사형당한 아돌프 아이히만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칼 아돌프 아이히만, (1906.3.19~1962.5.31)
※ 1962년 5월 31일,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 외곽에 위치한 라믈레 교도소, 자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사형 집행을 참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 초로의 남자가 교도관들의 호송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남자는 별 동요의 기색이 없었습니다. 교수대에 오르기 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 규칙에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참관자들을 향해 이야기하죠.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어갈 거요.” 그의 얼굴에선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를 후회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칼 아돌프 아이히만’ (Karl Adolf Eichmann), 나치 친위대의 중령이었으며 2차 대전 기간 중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장본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출처)
정치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것.
그렇다면 교회가 해야하는건, 정치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도록 이끄는게 아닐까 싶어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