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후 신입직원 교육을 받고 12월중순에 부서로 배치되었다. 군기가 바짝 들어 직장선배들의 이름을 대충 알아갈 즈음, 연말이라 망년회를 하였다. 강남의 으리으리한 식당으로 30여명이 단체회식을 갔는데 뭘 그리 잊어버리고 싶은 게 많은지 처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몇 번 술을 주고받더니 분위기 메이커인 내 직속상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며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앉은 순서대로 따르다가 내 앞에 와서는 '어이! OOO, 우리 부서에 온 것을 축하한다. 술 한 잔 받아라' 하길래 나는 솔직히 '선배님. 저는 예수 믿어서 술 안 먹습니다'라고 했다. 갑자기 선배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 새끼 봐라. 선배가 술 권하는데 뭔 소리여? 받으라면 받아, 임마!' 하고 윽박질렀다. 계속 안 마신다고 했더니 술잔을 내 턱밑에 바짝 대고는 험악한 얼굴로 노려봤다. 그렇게 약 20초간 기싸움하다가 갑자기 술잔을 획 집어던졌다. '쨍그랑' 술잔 깨지는 소리에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회식자리가 찬물 끼얹은듯이 조용해졌다. 선배는 씩씩거리며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버렸다.
10여초가 지나자 또다른 분위기 메이커가 '자, 자, 신경쓰지 말고 놉시다' 하며 떠들자 또다시 시끌벌적해졌다. 나는 이 엄중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민고민하다가 10여분이 지난 후에 그 선배에게 술병을 들고 찾아갔다. '선배님, 술 한 잔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제가 선배님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수 믿어서 술 안 먹습니다' 라고 하니 선배는 '야, 야, 됐다 임마. 알았으니까 저리 가라' 하며 물리쳤다. 그렇게 내 생전 첫 회사 망년회는 어색하고 치열하게 치뤘다.
몇일이 지나자 또다시 회식자리가 만들어졌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익어가자 역시나 예의 그 선배가 일어나 술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아이구, 또다시 한 판 전쟁을 치뤄야겠구나' 싶어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내가 술을 받을 차례가 되었는데, 이게 왠 일... 선배가 나를 보더니만 뒤돌아서서는 '야, 사이다 어딨어?' 하더니 사이다를 가져와 따라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감사하게 넘어갔다. 그 다음부터는 식사자리에서 아무도 나한테 술을 권하지 않았다. 다들 또 술잔 깨질까봐 꽤나 신경쓰였던 모양이었다. 이 때 깨달은 것은 세상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믿음을 보여줘 버리니까 그들도 나의 믿음을 인정해 주더라는 것이다.
문제는 술 안 권하는 것은 좋은데 술 먹으면서 회포를 푸는 회식자리에서 나는 꿔다 논 보리자루마냥 점점 왕따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사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는 공식적 업무를 보는 사무실보다 비공식적 모임인 회식자리에서 다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되니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 흉허물없는 인간관계를 맺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나님,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기도한 끝에 한 가지 지혜를 얻었다. 그 다음부터는 회식을 하면 내가 술병을 제일 먼저 잡고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잔에는 물을 따르고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했다. 물 한 잔 먹고는 '어우, 취한다'라며 혀를 꼬부라트리고는 같이 큰 소리로 떠들며 어울렸다. 술을 안 먹어도 술 먹은 사람들보다 더 떠들었다. 교회다니는 남자들은 하도 말을 잘하기 때문에 얼굴에 수염도 잘 안난다는데, 역시 하나님은 우리 예수쟁이한테 말 잘하는 달란트를 주신 모양이다. 그리고 술취한 사람들은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했던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데 끝까지 들어주고 맞장구쳐줬다. 그렇게 해서 1차 회식자리는 잘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또 문제가 생겼다. 2차는 보통 노래방으로 가는데, 예수 믿다 보니 세상노래를 다 까먹어 아는 노래가 없었다. 노래방에서도 내가 왕따였다. 신나게 즈그들끼리 노는데 탬버린만 힘없이 쳐주는 역할만 해야 했다. 또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노래 모른다고 2차에서 못 어울리면 동료의식이 없어지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요?'... 하나님께서 또 지혜를 주셨다.
대중가요 중에서 건전한 것들로 5곡을 달달 외웠다. 그리고는 다음부터 노래방을 가면 내가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왜냐하면 내가 겨우 외워놓은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먼저 불러버리면 말짱 꽝이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잡고는 첫 곡으로 분위기를 확 띄우는 노래를 불렀다. 주로 윤수일의 '아파트'나 최헌의 '오동잎'을 불렀는데, '빠빠빠~~~ 빠바바바바...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으쌰으쌰, 바람부는 갈대 숲을 지나~~~~'. 이 쯤 부르면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춤추며 찌르며 신나게 합창했다. 다음에 노사연의 '만남'이나 조용필의 '친구여' 등 느린 곡을 하나 더 부르고 빠지면 다시는 나한테 마이크가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 스타트를 내가 끊으면서 분위기를 달궈줬고 같이 동참한 인상을 확실하게 심어줬으니 나머지 시간은 편안한 마음으로 탬버린만 열심히 쳐주면 되었다.
3차는 보통 맥주집이나 당구장이었는데, 3차까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다들 비틀비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도 정신이 말짱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택시를 잡으려고 도로로 뛰쳐나가 '따블!', '따따블!'을 외치고 있는 동안 나는 유유히 차를 몰고나와 그 날의 VIP들만 차에 태워 집까지 친절하게 택배서비스를 해드렸다. 이렇게 되니 이제 회식이 있는 날이면 상관들께서 'OOO씨, 오늘도 회식 참석하지?' 하며 은근슬쩍 물어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성경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직에서 세상사람들과 섞여 생활하다 보면 술자리, 룸살롱, 나이트클럽 등 시험의 자리를 피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피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정면돌파를 하는 게 가장 지혜롭다. 나도 세상문화에 섞이지 않으려고 힘들게 발버둥치다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이렇게 의연하게 대처하기까지는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유념할 것은, 예수 믿는다고 세상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질식할 것 같은 건조한 은혜에 머물러서는 절대 안된다. 통상 예수믿는 사람들은 회식이 있으면 1차에서 음식만 먹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된다. 끝까지 남아 어울리면서 5리를 가자는 그들에게 10리까지 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예수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맨땅에 헤딩하듯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으나, 대학에 올라가는 고3학생들이나 취업을 앞두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꼭 이 경험을 얘기해줘서 지혜롭게 세상에 적응하도록 조언해주고 싶다. 나에게 세상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