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 담임목사님 설교를 듣고...
예수와 함께 장애의 길을 걷다-일상의 축복
대개의 흉추환자들이 겪는 고통은 보행의 불편함과 함께 배설입니다. 흉추를 다치며 배설신경에 이상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빈뇨가 오기도 하고, 아예 요의가 느껴지지 않다가 실금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빈뇨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비뇨기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주 병원에가서 진찰을 받다가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요의가 느껴지면 바로 소변을 보는 것이 낫나요?
참아서 소변량을 쌓아두어 보는 것이 낫나요?
의사의 대답은 저를 공포에 싸이게 했습니다.
배뇨는 패턴이 사람마다 다르니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배뇨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배뇨를 못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무서웠습니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시기전 배뇨를 못하셔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 배뇨를 못한다는 것은 제게 큰 질병이었습니다.
‘일상의 축복’을 떠올립니다.
연하남쓰의 노래중 설거지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
사랑해 말보다 한 번의 설거지가
그녀에겐 사랑인 것을
티격태격 다툰 날이 더 많았지만
오늘은 보여준다 설거지 사랑
덕지덕지 그릇에 붙은
스트레스 날려버리면
내 마음도 샤방샤방 해지고
눈 흘기며 쳐다보는 우리 마누라
오늘 저녁 장어구이 >
그녀가 원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상에서 받는 설거지 한번이 사랑의
값진 표현입니다.
연탄길로 유명한 이철환 작가가 하루는
딸의 이런 메모를 보았다 합니다.
<오늘은 아무일도 없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우리는 혹시 살면서 뭔가 대단한 사건을 기대하며
사는 건 아닐까요?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를 쓰러뜨리는 것은 거목의 넘어짐이 아니라
나뭇잎 한 장의 떨어짐이다>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일 공급되던 만나가 뚝 끊깁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여호수아 5:12)
아무 수고 없이 받아 먹는 만나가 축복일까요?
자기가 일상에서 한 노력으로 얻은 소출로 음식을 해 먹는 것이 축복일까요?
그건 단연코 후자입니다.
인간은 참 변덕장이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을 싫어하는데는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수동의 형태로 전락하는 생활 때문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의, 식, 주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왜 모두들 시설에서 탈출을 꿈꿀까요?
자율성, 일상에서 누리는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불평까지 모세에게 합니다.
‘애굽에 있을때는 먹을 것이 다양하게 있었다. 고기도 있었고, 마늘도 있었다’-마늘이라도 먹고 싶은 일상을 그들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변 조차도, 제 뜻대로 안되는 상황에서 매일 이 말씀을 붙자고 버팁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