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3남 전도회 기도회에서 은혜 깊었던 성경 말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지난주 담임 목사님 설교를 GBS교재를 중심으로 되새겨 보고 의문점들에 대해 토론했는데 ‘갈6:11~15’이었습니다. 서로 나누던 중에,
갈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이 구절에서 ‘박해는 누구로부터의 박해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었고 거의 같은 구절인 5:11의 말씀,
갈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여기에서 언급된 박해는 ‘예수를 믿는 거짓교사들로부터의 박해(이하 거짓교사)’ 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박해(이하 유대주의자)’ 두가지 중 하나로 판단했고
제가 생각한 위의 박해는 거짓교사들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그 근거는
① 거짓교사들 주장은 예수를 믿긴 하지만 구원은 십자가만 의지해서는 안되고 할례도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11절의 할례로 바울이 박해를 받았다면 박해의 주체는 거짓교사들이다.
② 베드로도 갈2장에서 외식한 것은 거짓교사들을 두려워한 때문이었고
③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주의자들의 박해였다면 바울은 할례의 여부를 언급하는 것보다는 예수를 믿어서 박해를 받았다라고 고백하여야 하며
④ 갈라디아서는 ‘거짓교사들의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아 작성되었으므로 여기서의 박해는 유대인 전체보다는 거짓교사들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러면 6:12에서 거짓교사들은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란 물음이 제기됩니다. 거짓교사들이 할례를 주장하지 않았을 때 잃을 것은 ① 할례를 받은 것으로부터 오는 자기자랑(12절) ② 할례 즉 율법을 주장하는 다른 거짓교사들의 비난, 두가지로 생각했고, 또한 예루살렘의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사도들도 포함- 중에 소수이었을 거짓교사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은 지금의 이 시대에도 행위를 주장하는 신앙인들은 타인을 정죄하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많은 진정한 성도들이 포용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점점 작아지고 조용해지는 거죠.
반대하는 전도회원들의 주장은
① 거짓교사들만의 박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협소하고
② 바울이 받은 박해는 유대인들로부터 왔으며
③ 11절의 ‘지금까지의 박해’를 소수 거짓교사로부터의 박해라고 할 수는 없다.
서로 논쟁이 길어졌고 엄청 뜨거운 분위기였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이렇게 함께 토론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기쁨이고 참즐거움이죠.
결국 토론 시간은 끝나고 GBS교안을 작성하신 김일호 목사님께 문자 연락했습니다.
[ 삼일교회 기도회 시간에 격렬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GBS 교재로 나누다 궁금한 점이 있어 문자 드립니다.
(1) 갈 5:11에서 바울을 박해하는 주체가 *거짓교사(예수 믿음)인지? 또는 *거짓교사가 포함된 유대인(안믿는자)인지?
(2) 갈6:12에서 박해하는 주체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좋은 질문이라고 하시며 신학자들 중에서도 이 부분 문제 제기가 있었다고 하시네요. 통화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을 정리합니다.
① 갈라디아서의 내용만으로는 거짓교사들의 박해로도 판단될 수 있다.
② 그러나, 초기 유대인들의 박해는 예수를 믿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이 율법을 해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판단했으며, 큰 박해의 시발점이 된 스데반의 순교 이유도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행6:14)함에 있었으며,(바리새인 쪽의 주장)
③ 부활, 천사와 영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안에 있는 부활을 전했기 때문에 반대했고(행23:8)
④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판단(행5:34~37)도 사도들에 대해 상당히 유한 모습이며
⑤ 거짓교사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있었으나 그들의 잘못됨과 정죄를 박해라고 표현하기엔 정도가 약하다는 점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린다면, 갈5:11 과 갈6:12의 박해의 주체는 은혜의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거짓교사를 포함한 유대주의자들 전체로 봐야 타당할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이 구원의 길임을 인정한다면, 현 시대에 팽배해 있는 행위, 열심, 공로주의 등 우리의 자격을 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구원과는 상관없음을 또한 인정해야겠지요. 물론 우리의 열심 역시 은혜의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감사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말씀으로 조언해주신 김일호 목사님께 감사드리고, 무엇보다 뜨거운 토론을
함께 나눈 우리 3남 전도회원님들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 삼일교회의 모든 모임 모임이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함께 하는 나눔의 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끝-
저도 나눔을 공유할까 합니다.
"나"를 핍박하는 것이 과연 "너"뿐 일까요?
"육신을 입고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깨달아 가고 있는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나"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가 함께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멀리 있는 "너"을 살피기 보다는
"나"를 핍박하는 가까이 있는 "나"를 먼저 경계해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나"만을 "진정한 나"라고 여길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를 "사망의 몸, 너"라고 여길 수 있을것입니다.
핍박이라고 해서 꼭 고통이나 괴로움을 동반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것은
사망의 몸은 늘 '이 정도면 됐다. 어쩔 수 없다. 이정도는 해야지'라는 달콤한 것으로 다가오니까요.
이 시대에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할례"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나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는지, 혹은 나를 넘어서 남에게 까지 강요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