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학청년부 4진 권대원 형제입니다. 이번에 ㅍㅍㅅㅅ 라는 미디어에 기고한 글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아이스버킷 챌린지나 감사릴레이를 팀별로 많이들 하시는 것 같습니다. 루게릭병환우를 돕는 좋은 취지와 신앙의 미덕으로서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있는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아픔에는 철저히 침묵하며 외면하는 기독교인과 교회의 모습들이 마음 아파 글을 썼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교우들의 진심과 진정성을 비난하는 취지가 아니라, 이 어둡고 불의한 시대에 우리들만의 천국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썼습니다. 마침 1938년 9월10일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날입니다. 교회가 '역사와 시대'앞에 완벽하게 분리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신사참배 결의를 통해서도 깊이 반성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원문 글 링크: http://ppss.kr/archives/28493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기독교를 돌아보며
얼마전부터 기독교인들사이에 SNS에서 ‘감사 릴레이’ 열풍이 불고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가 맨처음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절이 하 수상하고 어두워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 어떤 기독교인이 시작했는데 많은 공감을 얻어 지금처럼 연쇄적으로 퍼져나갔을 수도 있다. 내 주변의 친한 지인들도 감사 릴레이 글을 쓰곤 한다.
한명 한명 감사한 제목들을 보면 감동이 되는 글들도 많다. 그러나 대체로 나는 지금의 이 엄혹한 시절에 기독교인들이 다소 생뚱맞은 ‘감사릴레이’를 벌이는 것이 그렇게 예뻐 보이지가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 있을 때 억지로라도 ‘감사’하려 했을 때 놀라운 마음의 평화와 상황의 변화가 있었던 신비한 체험도 있기에 ‘감사’라는 신앙적 미덕이 얼마나 능력있고 소중한 가치인지 모르는 바 아니다.바울도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독교인들의 ‘감사 릴레이’가 불편하고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지금까지 시대의 아픔과 이웃의 고통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반응해 왔는지 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대의 아픔과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기독교인들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지금까지 사회적인 불의와 약자의 고통에 침묵하며 외면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내세의 천국과 현세의 축복을 갈구하며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 부르짖는 기독교인들이 꽤나 많지만, 이상하게 시대의 아픔과 사회전반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기독교인들이 많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성과 속’, ‘세상일과 교회일’을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하고 접근하는 이원론적 신앙관이 교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원론적인 신앙관이 한국교회의 주류신앙이 된 이유는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그중 특히 혐의가 짙은 것은 근대화 과정속에서 일제식민지 치하나 독재정권의 폭압속에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저항을 하거나 약자의 편에서는 ‘신앙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적절히 타협하면서 철저히 개인축복만을 강조하여 ‘교인수 증가’를 도모한 종교지도자들과 주류기독교의 영향이 가장 커 보인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기복적이고, 정치적으로는 권력자와 강자의 편에 서며, 현실참여에는 소극적이고, 철저히 교회생활 중심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저 유명한 ‘소금과 빛’ 비유 말씀 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보아도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무거운 책임의식’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의의 문제”에 민감하게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특히 구약성경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면 지도자가 백성들을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 정치와 종교지도자의 부패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과 사회적으로 착취받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대우가 곧 이스라엘 공동체의 심판과 회복의 기준이 된다는 말씀이 수도없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꿈이나 꾸고, 늘어지게 누워서 잠자기나 좋아한다.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이사야서 56:10.11]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 [시편99:4]
너희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와 엄청난 죄악을 나는 다 알고 있다. 너희는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다…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12,13,24]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12:20]
게토 안의 신앙인가? 사회를 품는 신앙인가?
기독교가 ‘개독교’로 욕먹으며 동네북이 되다시피한 지금,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원론적 신앙관’의 문제점을 깊이 반성하고 돌이켜야 할 필요가 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교회생활에 열심이다’ 라는 의미 외에 그 사람에 대한 어떠한 인격적, 도덕적 성품도 보증이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통렬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교인들과 목사, 신학자들은 현실 속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일부 기독교인들’의 문제로 안이하게 여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교회의 원리는 사회와 같지 않다’는 논리아래 비신앙인들이 자기들만의 잣대로 너무 가혹하게 교회를 매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교회를 향한 외부의 비판이 어떻든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교회일에만 관심을 둔다. 그리고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아파하거나 참여하려는 기독교인들은 뭔가 세속적이고 신앙심이 부족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신앙인으로 치부하며 외면한다. 그렇게 (세상일에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성경이나 한장 더 읽고 기도나 하라고 말한다.
그럼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교회 일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이 사회의 모든 문제와 부조리를 알아서 고쳐주실까? 그렇다면 왜 교인들을 늘리기 위한 선교나 전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잠잠히 기도만 하지 않는걸까? 세상일은 교회 밖 일이니까 땀흘려 수고하는 것이 가치없는 일이고, 교회 일은 ‘하나님 나라’일이니까 최우선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교회 안의 일’로 제한하는 이중잣대와 이원론적 사고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자기만의 게토에 갇혀서 사회와의 교감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뿌리깊은 원인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과 밖을 아우르는 통전적인 개념이므로 우리는 교회의 건강함과 성장을 위해 양육과 선교에 힘쓰는 만큼 동시에 기독교인이 속한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수고롭게 일해야 한다.
아니, 사실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서 더 할 일이 많다. 기독교인이 삶으로 살아내야할 신앙의 터전은 사회인가? 교회인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신앙생활이 거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교회가 품고 섬겨야할 세상은 관심대상에서 밀려나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좀 헌신적이고 신앙이 좋다는 기독교인들은 교회일이 너무도 바빠 가정과 교회일 외의 그 어떤 사회적인 이슈에도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졌다.
그러면서 교회는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래서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올바른 사리분별과 판단을 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사회적 의제에 성숙한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대응하며 지혜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 사회의 마지막 윤리적, 도덕적 보루로 기능하기는 커녕 교회 밖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지독하게 무지하고 편견에 가득차 근거없는 유언비어에 매번 선동당하는 무지몽매한 집단이 되어버렸다. 근거없는 카톡 유언비어의 진원지 상당수가 교회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생명보다 돈의 가치에 예민한 기독교인들
최근, 페이스북 친구인 어떤 기독교인이 ‘세월호 유가족에대한 보상금이 몇 십억이라는데 유가족들이 정부에 너무 과도한 걸 요구하는게 아니냐, 대학특례입학이 말이되는냐’하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보고 다른 분들이 그 이야기가 얼마나 근거없는 이야기인지 설명하는 댓글을 달아서 설명해줬지만, 그녀는 목회자에게 받은 카톡 루머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더 기가막혔던 것은 그녀가 평소 세월호 관련해서 거의 아무런 안타까움과 관심도 표명하지 않다가 세월호 소식과 관련해서 처음 올린 글이 ‘유가족들의 보상금과 특례입학 대우가 너무 과하고 형평성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알아보니 교회 내에서 그런 유사한 유언비어가 끊임없이 목회자, 집사, 간사 들을 통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단 30분만 투자해서 인터넷으로 관련뉴스나 자료만 찾아봐도 그 ‘유언비어’가 얼마나 근거없는 내용인지 알 수 있을텐데, 그 30분을 투자하기 싫어 ‘자신들이 좋아하고 철썩같이 믿는’ 목회자 ,장로, 집사들의 근거없는 루머를 퍼뜨리며 흑색선전의 진원지가 되어가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리석고 무지한 기독교인들을 속이고 선동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차별금지법은 동성애로,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하면 종북 빨갱이로, 담임목사의 비리와 불의를 지적하면 이단으로 매도하면 상황종료다.
무엇보다 수많은 가족이 자식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잃은 아픔과 그 억울함을 풀어줄 진상규명을 해달라는 요구에는 아무런 공감과 안타까움도 표현하지 않고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던 기독교인들이, 보상금과 특례입학에 대한 유언비어에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불공정함(?)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니 넘 씁쓸하고 참담했다.
이런 모습들은 어느새 기독교인들이 이웃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생명’이 아닌 ‘돈’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지금 몇달째 기독교 서적 부동의 베스트셀러 1위가 ‘당신도 하늘은행에 입금하면 최소 이자율 3000%의 거룩한 성부가 될수있다’고 주장하는 ‘왕의 재정’(김미진/규장)이라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3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긴 참혹한 참사와 힘없는 청년이 군대에서 ‘살려달라’ 애원하다 고참들에게 맞아죽고, 33분마다 1명이 자살하여 10년연속 OECD 자살율 1위를 달리는 이 나라의 비극과 아픔에는 기독교인들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 아닐까?
이런 사실들을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망가지고, 내 이웃들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하든 ‘그건 내 사정이 아니고 오직 나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번영과 부를 누리고 싶다’는 기독교인들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지금은 금식과 회개의 릴레이가 필요할 때
지금 기독교인들에겐 ‘감사 릴레이’보다 ‘회개와 금식의 릴레이’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시대의 불의와 약자의 아픔에 눈감고 오직 자기 교인들만 늘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교적 승리’라고 생각했던 전 세대 목회자들이 뿌려놓은 씨앗의 열매가 지금의 만신창이가 된 기독교를 낳았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덕분에 기네스북에도 오른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갖게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교인수가 성장한 기독교가 되었지만, 그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과 상식을 잃어버리고 생명의 가치마저 우습게 여기는 가짜 기독교였다.
※가장 교인수가 많은 교회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던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목사는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 소유 주식 25만주를 당시 시가보다 4배 정도 비싸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사들여 교회로 하여금 130여 억대의 손해를 끼쳤으며 이 과정에서 35억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징역3년에 집행유예5년, 그의 아들 조희준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우리 선배들은 일제시대, 일제의 탄압이 두려워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명백한 우상숭배인 신사참배조차 타협하며 이 사회의 불의와 시대적 비극을 외면하고 교인수만 늘리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에도 독재와 폭압의 권력이 무서워, 이땅의 불의와 비극 앞에 눈을 감고 오직 교회일에만 열심을 내고, 개인축복만을 갈구하며 그런 번영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열심히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참담한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 그 결과로 한국 교회는 ‘진리의 빛도 잃어버리고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이땅에서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만신창이가 된 존재가 되어버렸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아님 이제라도 돌이켜 회개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의 복음’을 되찾을 것인가?
진짜 기독교인과 가짜 기독교인
기독교인들에게 ‘생명’의 가치를 대체할만한 가치는 없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마치 국가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위로부터 허락한 절대주권을 흔드는 범죄인냥 생각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라. 하나님의 백성이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선민의식에 젖어있던 이스라엘조차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히 파괴해 버리셨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의 가치’에 도전하는 것은 그것이 어마어마한 돈이나 권력, 더 나아가 국가나 교회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상대적 가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교회 담임목사이기에 그가 성범죄와 횡령과 세습을 해도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고, 국정 최고권력자이기에 어떤 불의와 폭압 앞에서도 침묵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건한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외쳤던 예언자들을 핍박하고 학대하며 그들을 앞장 서서 죽인 자들은 기존의 부패한 교회, 기존의 부패한 국가, 기존의 부패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던 거짓 종교지도자들과 정치가, 왕이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하면 위험한 책이다. 참된 생명의 가치에 도전하는 것들에 대해 ‘저항’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항했던 ‘예언자적 기독교인’들을 통해 세상은 ‘생명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실현되어 왔다.
기독교인들의 시선은 항상 ‘생명’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것도 가장 약하고 여리고 보호가 필요한 생명을 향해 예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살아있다. 그것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 아니던가? 사랑과 긍휼을 잃어버린 무심한 마음은 그가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드러내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이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아모스 5:7~24]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아닐까?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에 가장 고통받는 약자들을 향한 그의 태도가 결국 참된 기독교인과 가짜 기독교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사람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거라.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병들고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이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갇히신 것을 보고 돌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의로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25:41~4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기독인 모임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광화문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촛불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추석연휴때는 쉬고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