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두 선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한말들이지 나쁜뜻이 있었던 분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조현삼 목사님(감자탕교회)의 글 하나를 인용합니다.
--"다윗의 아들중에 암논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복 여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은 다말입니다.
이 여동생을 연모한 암논이 그 여동생을 유인해서 성폭행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미워하고 쫓아냈습니다.
이일을 당한 다말이 친오빠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압살롬입니다. 오빠에게 가서 사실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오빠는 아무에게도 그 일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고 그것을 마음에 품고 2년을 기다렸습니다.
2년후에 압살롬은 암논을 죽였습니다.
그 일을 벌인후에 압살롬은 외할아버지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그술 왕입니다.
그곳에서 3년을 지냈을때 다윗의 마음이 그 아들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한 것을 보고 다윗의 신하 요압이 다윗으로 그 압살롬을 불러들이게 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이스라엘 땅으로 부르긴 했지만 다윗은 그 아들을 대면해서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냈던 압살롬이 아버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아들이 일으킨 반역으로 피난을 가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압살롬은 죽고 반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회개없는 관계의 회복의 위험’이 느껴졌습니다.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암논이 자기 여동생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회개하는 것 대신, 어쩌면 암논이 지은죄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 했는지 모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압살롬이 회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문제는 압살롬과 같이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럴때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때로 이것이 우리를 고민스럽게 합니다.
용서는 용서와 용서의 적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키입니다.
용서는 우리 마음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회개와 상관없이 우리는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와 동시에 용서를 적용할수도 있지만, 때로는 용서와 용서의 적용시점을 달리해야 할때가 있습니다.
용서는 우리 마음에서 즉각하고, 그 용서의 적용은 죄를 지은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할때나
지은죄에 대한 일정한 조치가 끝난후로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용서와 용서의 적용을 구분해서 적용하면 다른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내가 힘들어하고 고통겪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으로 즉각 용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둘러 용서를 선포하거나, 죄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관계를 정상화 하는 것의 위험으로 부터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에 적절한 조치를 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 일을 납득합니다.
이렇게 하면 공의도 만족시키고 사랑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상대가 무슨죄를 짓든지 그와 상관없이 계속 그에게 일을 맡기고, 그와 동행하고, 그와 교제하고, 그를 이전처럼 그대로 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는 때로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향해 내린 조치, 외할아버지에게 도망간 압살롬을 부르지 않은 것은 적절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나서서 회개하지도 않는 압살롬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것 같고 관계를 정상화 하는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때 단호하게 조치했다면 아들이 일으킨 반역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과 그 용서를 적용하는 것을 우리가 구분한다면, 죄와 용서 사이의 갈등과 고민은 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지 집사님과 저의 강조포인트는 위 조목사님이 글에서 말씀하시는 ‘마음속에서 하는 용서’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제럴드 싯처 라는 분의 글 하나를 싣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용서의 선물을 선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용서는 자비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받을 가치가 없을 경우라 하더라도
베푸는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야 비로소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사람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용서해야 할 때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는 저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용서를 실천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고백이 용서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용서해야 한다. --
그리고 많은 분들께서 지금 언급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신 것은 윗 글에서 조목사님이 섯부른 시행을 경계하신 ‘용서의 적용’. 회개없는 관계회복의 위험’쪽에 강조점을 두신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누구보다 이 사건에서 이 부분에 대해 철저함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며, 지 집사님의 글에서도 그와 같은 정서였다고 봅니다.
시점과 상황이 적절했는가, 피해자매의 마음을 좀더 깊이 헤아렸는가하는 부분은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의 부주의에 대한 지적은 몰라도 피해자매의 아픔이 안타까워서 선한뜻에서 하신일이니 과한 비난은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 몇 개 댓글들이 달리면서 저의 댓글들은 좀 과격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의 댓글들을 읽고 마음 상하신 분들께는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평강중에 역사하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미움이 조금씩이라도 지워져갔으면 하는 마음에 여러 말들을 하긴 했는데, 오히려 제가 평화롭지 못했네요.
주님의 은혜가 삼일교회와 함께 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여전히 용서를 강요하고 싶어하는걸 보니
결국 사과를 빙자한 자기변명 자기변호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게지요
자기는 자신을 반대하는 의견하나 수용할 여백의 마음하나 없으면서
지울수없는 상처로 힘들어하는 피해자 자매들에게 용서하란 말은 어찌 그리 자연스러우신가요?
장문의 글 그만 올리시고 자중하시면서 이래라저래라 남에게 강요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옳은 말보다 옳은 행동 많이 하시며 사셔요.
물론 저도 그렇게 노력 하겠습니다.